부끄러움에 대한 오래된 기억이 있다. ‘국민’학교 때,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라는 걸 했다. 때는 70년대 후반이었다. 선생님이 질문하면 해당하는 아이들이 손을 들었고, 선생님이 그 수를 셌다. 질문은 이런 종류였다. 집이 자가인지 월세인지, 부모님 학력은 고졸인지 대졸인지, 아버지 직업은 전문직인지 자영업인지, TV가 있는지, 전화기가 있는지 등등. 나는 손을 들 때마다 부끄러웠다. 우리 집은 가난했기 때문이다. 다섯 식구가 좁디좁은 셋방에 살았으며, 부모님은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남의 머리를 깎아주는 일로 자식들을 건사했다. TV도 전화기도 없었다. 손을 들 때마다 계급이라는 피라미드에 나의 위치가 낱낱이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강요된 부끄러움이었다. 하지만 어린 나는 무력했다. 하소연할 언어도 알 수 없었다. 이 부끄러움은 그 후로 오랫동안 나를 심리적으로 위축시켰다. 반 아이들에게 내가 사는 곳을 들키지 않으려고, 하교할 때 빙빙 돌아서 집에 들어갔다. 누가 부모님의 학력이나 직업을 물어보면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반에서 부자인 아이를 부러워했다.
이런 나의 열등감이 사라진 건 대학에 들어간 뒤, 학생운동을 하면서부터다. 학생운동을 접하며 그동안 교과서에서 알려주지 않았던 사회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 내 가난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부모님의 가난을 이해하게 됐고, 가난에 당당할 수 있었다. 가난에 대한 계급적 자각이 일어났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단지 내가 태어나면서 내게 주어진 환경이자 조건일 뿐이다.
가난을 부끄럽게 여겼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버지의 직업을 묻는 것이 아이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싶다. “니 아부지 머 하시노!”라는, 영화 <친구>의 유명한 대사처럼.
아니 그보다 모든 직업을 떳떳하게 여길 수 있는 사회가 조성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기본 소득이 보장되고, 빈익빈 부익부의 구조가 해소되어야 한다. 우리 일상은 누군가의 노동으로 유지된다. 우리 삶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직업은 존중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