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나는 정리되지 않은 책장의 주인이다. 모서리가 닳아 떨어진 책의 주인이며 화면이 깨진 휴대폰의 주인이다. 선반에 놓인 수십개의 신발 중 가장 더러운 것 그것이 내 것이다. 나는 가진 것을 정리하는데 서툴다. 물건 뿐 아니라 인간관계 혹은 머릿속에서 이뤄지는 생각도 그렇다. 한번 들어온 정보를 정돈하지 않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 순간 자괴감과 함께 어디서부터 고쳐야 하는지 참 막막했다.
그래서 책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책 내용을 정리하기로 했다. 책은 나의 소유물 중 그 수가 가장 많다. 그만큼 일상의 대부분을 책과 함께 보내니, 분명 갱생의 시작은 그곳이여야 한다. 차차 책장도 정리해 갈 것이고 먼저 읽는 족족 리뷰를 남기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이미 읽은 책들에 대한 리뷰도 올려야 겠다는 생각에 가진 책들을 정리해봤는데, 놀랍게도 사랑에 관한 책이 굉장히 많았다.
사랑? 닉값하네! 스스로 사랑에 관심이 많다 생각한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참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꽤 열심히 읽었다. 훑어만 봐도 내용과 감상이 절로 떠올랐다. 흐음. 컨셉도 잘 맞고. 그래서 '사랑'을 주제로 리뷰 연재를 올릴 예정이다. 주저리 말이 길었지만 결론은 그거다.
아니 에르노. 지난 학기 서양의 현대문학 수업을 통해 알게 된 프랑스 작가다. 수상작들이 많고 프랑스 문학계의 거장이라고 소개되는데 비해 국내에서 유명하진 않은 듯하다. 당시 수업에서는 '남자의 자리'를 다뤘는데 그녀의 책은 대부분 국내에서 절판돼 구할 수가 없었다. "유명한 작가라면서 왜 안 파는 거야?"라며 투덜댔던 기억이 떠오른다.
"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는 작가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 자전적 소설을 주로 쓴다. 책 <단순한 열정> 에서도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있다. 그것은 러시아 출신의 A와 함께한 열애의 경험이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A는 유부남이다 그들의 연애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불륜의 정석이다. 먼저 전화하지 않을 것, 편지도 보내지 않을 것, 아내와 함께 하는 자리가 있으면 피할 것, 매우 한정된 시간 안에 사랑을 나눌 것 등 철저하게 고안된 그들만의 규칙 위에 관계는 유지된다. 생각만 해도 애가 닳는 제약들을 보며 그녀가 가진 사랑의 크기를 짐작해본다. 그녀는 왜 이런 미친 사랑을 하는 걸까? 책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다. 그와 그녀는 어디서 만났고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 알 수 없다. 책은 그저 열렬한 사랑에 빠진 한 여자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녀의 하루는 그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하루 종일 그를 기다리는 일 이외에 다른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심지어 그의 전화를 놓칠 염려 때문에 외출을 꺼리기도 한다. 집어 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그의 것이 아니면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기까지 했다고. 그녀가 이 사랑에 쏟는 '열정'을 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구절들을 몇 가지 소개하겠다.
말이나 문장, 웃음조차도 내 생각이나 의지와는 무관한 게 내 입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듯했다. 게다가 나는 내가 한 행동, 내가 본 영화, 내가 만난 사람들을 또렷이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나의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내 의지나 욕망, 그리고 지적 능력이 개입되어 있는 행동은 오로지 그 남자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그 사람과 함께 있던 어느 날 오후, 펄펄 끓는 물이 들어있는 커피 포트를 잘못 내려놓는 바람에 거실의 카펫을 태워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불에 탄 그 자국을 볼 때마다 그 사람과 보낸 열정적인 순간을 떠올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
파리 시내를 걷다가 세련되고 교양 있어 보이는 남자들이 운전하는 대형 승용차들이 거리에 늘어서 있는 것을 보면, A도 그들과 특별히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모두 사회적 성공을 꿈꾸고, 이삼 년마다 한 번씩 정부를 바꿔가며 성욕을 해소하고 사랑을 즐기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계속 거리를 걷다가 상점의 쇼윈도에 진열된 원피스나 란제리를 보게 되면, 어느새 나는 그 사람과 만날 다음번 내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나라로 떠났다.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를 보러 오지도 않았다. 시작부터 어긋난 사랑이 'happily ever after'로 끝날 거라고 상상하진 않았지만, 그의 선택은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하기 짝이 없다. 그녀는 좌절한다. 차라리 죽기를 기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음을 한탄하듯 일상의 생명력을 꺼버린다. 그를 붙잡아두지 못한 자신을 벌하기로 결심한 양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다. 그녀의 욕망은 모두 그를 향해있었기에 그가 없는 세상에서 모든 것은 제 가치를 잃어버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면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옷과 구두도 사야 할 이유가 없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 글의 첫 문장은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다. 이미 오래전 일이다. 하지만 시간이 무색하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날의 모습들. 그녀는 그것을 글에 충실히 담는다. 아름다운 것을 작품에 담아내는 예술가의 소명을 그녀는 이뤄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쓴다고 해서 그 사람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단순한 만큼 순수한 사랑. 책을 덮고 떠올린 키워드는 '순수'다. '사랑의 영역에서 과연 순수란 무엇인가?'의 질문으로 대신할 수 있겠다. <남자의 자리>와 함께 수업에서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다뤘다. 다수의 학생들이 '순수한 사랑이 아니다'는 감상을 표했다. 가난한 열 다섯 여자아이와 부유한 남자의 사랑. 그들의 나이차이와 경제적 수준차이가 그 이유였다. 그들의 감상평을 듣고 이러한 의문이 떠올랐다. '순수한 사랑'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의 순수는 불순물이 포함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순수한 사랑이란 사랑이 외의 것이 섞이지 않은 것이다. 외모나 재력 등 사랑해야만 하는 조건들을 배제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도무지 사랑이 자라날 수 없는 곳에서도 자라나는 사랑을 순수한 사랑이라 부를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아니 에르노의 사랑은 순수 그 자체다. 그 순수는 세상의 중심에 사랑하는 이를 데려다 놓는 아주 단순한 삶의 양식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단순한 열정'이라 고백했다.
열정의 색이 바랜뒤 찾아온 고통. 책의 원제인 열정을 뜻하는 passion이 예수의 수난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미루어 봤을 때 열정과 고통, 열애의 상흔 대해 누구나 쉽게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리뷰는 여기서 마치겠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쓸 수 없다"는 작가의 철학을 따른 결정이다. 나에게 그러한 고통에 대한 기억은 오직 간접적인 경험일 뿐이며, 행여 있다 하더라도 글로 옮길 정도의 깊이를 갖고 있지 않다. 아니 에르노의 솔직하고 처절한 묘사는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기에 충분하기에 실연의 아픔으로 힘들어하는 누군가가 이에 대한 글을 써주길 고대해본다.
우리는 그 후로 만나지 못하고, 그 사흘 후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좋은 책. 읽기 쉽고 재밌는 결정적으로 '얇은'책이다. 또한 사랑에 빠진 여성의 심리를 이토록 솔직하게 표현한 글이 있을까 감탄이 나올 정도로 공감되는 구절이 많다. 사랑을 손닿을 수 없는 사치의 자리가 아닌 자신과 같은 눈높이에 두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절절한 여심을 엿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