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김지영!
내가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후,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김지영 중에 너를 떠 올린 건 정말 우연이 아닌 것 같아.
너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내 짝꿍 김지영. 새학기가 시작할 무렵 전라도에서 전학 온 네가 바로 우리 집 옆집으로 이사 와 살았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봐도 참 신기하다.
눈을 감고 너의 얼굴을 조용히 떠올려봤어. 하얀 피부에 콧잔등 위로 살짝 뿌려진 주근깨, 버선모양의 콧방울, 반듯한 가르마에 양쪽 귀 옆 머리칼을 똑딱 핀으로 고정해서 잔머리 하나 삐쳐 나오지 않은 얌전한 단발머리.
이른 봄이었지. 그때 아이들 사이에 유행하던 뜻모를 영어가 잔뜩 써있는 잠바가 아닌 엄마 옷 마냥 진한 꽃분홍색의 누빔 옷을 입고 다녔던 너. 우린 여학생들이었지만 반에서 키가 제일 컸기에 어른 옷을 입어도 얼추 맞았어.
내 기억이 맞다면, 너희 부모님께선 도매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셨지. 고향에서 보내온 건어물 박스로 집이 가득 차 있어서 네 방이며 거실이며 누울 곳이 없다고 했어. 나는 말린 해산물 냄새로 가득했던 너희 집에 딱 한번 들어가 본 것 같아.
네게는 고등학생 오빠도 두 명 있었어. 부모님이 새벽 장사를 나가시고 나면 너는 아침에 책가방을 싸는 대신 오빠들 도시락이며 네 도시락까지 모두 다섯 개를 싸야 한다고 했지. 그런데 나는 한 번도 네가 지각하는 걸 본 적이 없었어. 점심시간이 되면 너는 네 도시락보다 다른 아이들 도시락 반찬에 더 관심이 많았어. 네 눈빛이 유난히 반짝 거리는 걸 봤거든. 항상 마른 오징어 무침이나 마른 새우볶음 아니면 멸치볶음이 들어있던 네 반찬은 아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너는 참 밝고 씩씩했어.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건 너의 도톰한 손등이야. 한창 외모에 관심이 많고 친구들과 놀고 싶고 이성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나이였는데, 너의 손등은 늘 거칠게 터 있었어. 너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면 서둘러 집안일을 해야 한다고 했어. 오빠들은 아예 안하니까, 빨래며 설거지며 청소를 네가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다고. 당연한듯 태연하게 말하는 너를 볼 때면 나는 두세 살 더 많은 언니를 보는 기분이었지. 방과 후 늘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뛰어가던 나는, 숙제 다 하고 5시 반 TV 화면조정시간이 끝난 후 바로 시작하는 만화를 볼 생각으로 가득했었거든. 그래서 네가 너희 집에서 하나뿐인 막내딸로서 보호받지 못하는 거 같아 그게 늘 안쓰러웠었어.
김지영, 지금도 잘 살고 있니?
그때처럼 씩씩하게?
그랬으면 좋겠다.
내 친구 지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