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과 증오는 상대가 아닌 나를 집어삼킨다
누구나 가슴 속 한 켠에 남 몰래 접어 둔 누군가를 향한 원망이나 억울함이 있을 것이다. “난 뒤끝 없다!” “난 지나간 건 생각 안 해!”라고 말하는 일명 쿨 한 성격의 소유자들일지라도 의식하지 못할 뿐 심연에는 잠들어있는 감정의 파편들은 있게 마련이다. 크던 작던 상처를 받으면 그 정도가 다를 뿐 흉터를 남긴다. 큰 트라우마의 경우 머리로는 잊자고 해도 세월이 흐른 어느 순간 밀어닥친 감정들로 숱한 밤을 뒤척이게 하기도 한다. 아침은 어김없이 또 찾아오고 변함없이 일상은 또 이어지기에 우리는 덮어버린다. 그리고 또 그렇게 지웠다고 믿는다.
하지만 과연 지워졌을까? 의식적으로는 지워버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음이 그렇게 단순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우리 마음이란 것이 진심으로 이해하고 용서되지 않은 일들은 결코 쉽사리 사라지지가 않는다. 지워버린 듯 모른척 해보아도 언제나 미완료 상태로 존재한다.
내 기준에 억울하다고 판단되는 일들이라면 움켜쥐고 더 힘주어 붙잡아둔다. 증오와 원망,자책을 오가며 상대방에게 매일 못다한 말을 퍼붓는 상상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들이 상대방보다 자신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계속된다. 하지만, 이러한 상대방을 향한 악감정은 사실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그와 비슷한 부정적 감정들을 자석처럼 계속 끌어당기고 있다.
누군가를 미워하려면 나를 함께 갈아넣어야 하는 것이다.
히어로물 영화들을 보면, 악당들이 분노를 품고 그 분노가 커질수록 점점 더 기괴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 악감정들은 사랑의 감정만큼이나 그 에너지가 강력하다. 때때로 사랑은 기적을 일으킨다. 그런 마음의 에너지를 악감정에 담아 매일 곱씹고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데 쓴다면 현실이 계속 그 화를 입고 살아가는 악순환을 겪게 되는게 당연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지키고 자유로워지기 위해 용서해야 한다. 용서함으로써 악순환되는 감정의 고리를 끝맺음해주어야 한다. 대부분 상처 준 대상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용서가 상대방을 위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코 아니다. 용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증오하고 원망할수록 커지는 고통은 결국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미움과 원망은 자신을 해치며 고통의 지옥에 가두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내 안에 쌓인 고통들은 자신뿐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이나 가까운 주변까지 해치고 고통스럽게 하기도 한다.
상대방은 기억조차 못하는 일을 평생 가슴에 품고 자신을 병들게 하는 경우가 실제로 너무나 많다. 누구를 위한 증오와 원망일까? 불행을 계속 떠올리면서 행복이 왜 안 오냐고 하는 건 모순이다. 현재 자신의 머릿속을 제대로 펴보고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진짜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 의식의 차원을 밝은 곳으로 옮기고 긍정적인 삶을 위한 생각들을 선택하고 품어야 한다. 상처를 준 대상, 상황, 사건들은 이미 떠난 버스다. 생각 속에 그것들은 환영과 다름없다. 나를 위해 내려놓자. 그럴 때 우린 과거로부터 걸어나와 새로운 다음 차원의 문을 열 수 있다.
용서와 화해의 상징하면 ‘(故) 넬슨 만델라’ 대통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91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났다. 당시 남아공은 백인들이 흑인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차별을 보고 겪으며 자란 만델라는 성인이 되어 인종 차별 폐지를 이끄는 변호사가 되었다. 1962년 만델라의 세력이 커지자 백인 정부는 그를 탄압했다. 먹히지 않자 결국 정부는 만델라에게 국가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종신형을 선고해버렸다.
남아공 백인 정부는 만델라를 설득하려 시도했지만 그의 신념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세계의 여론까지 석방하라는 목소리는 거세졌다. 시간이 흘러 1992년 그는 무려 27년의 옥살이를 끝내고 석방됐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대단한 건 그의 민주화를 위한 끈질긴 노력은 한번도 멈춘 적이 없었던 듯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350년간 이어온 차별정책을 폐지시키고 민주헌법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만델라는 199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그 이듬해인 1994년 흑인 최초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자 그동안 핍박받던 흑인들의 억울함과 분노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 백인 정부가 저질렀던 죄를 처벌해야 한다며 곧 반란이 일어날 듯한 태세였다. 그 때 만델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선택을 했다. 오히려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않는다’는 슬로건을 걸고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죄를 시인하는 백인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노력은 화합의 결실을 맺었고 덕분에 남아공은 평화로운 발전을 이뤄내며 2010년 월드컵까지 훌륭히 치뤄냈다. ‘만델라 방식’은 이후 다른 국가들의 민주화 과정에도 큰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만델라 대통령의 집권당시의 횡보들은 정말 놀랍다. 그는 첫 부통령에 백인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을 임명했었다. 뿐만 아니라 흑인 차별정책을 진두지휘하며 자신에게 종신형을 내렸던 검사를 관저에 초대해 극진히 대접을 했다고 한다. 또한 투옥 당시의 교도소장을 대사로 임명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굳은 신념이 담긴 이 말을 보면서 깊이 공감했다.
사람들이 증오를 배운다면
사랑도 배울 수 있다
임기가 끝나던 1999년 국민들은 대통령직을 연임하길 원했지만 그는 과감히 물러났다. 그리고 2013년 차별없는 무지개같은 세상을 희망하던 그는 생을 마감했다. 그를 떠나보내는 자리에는, 전 세계 91개국 정상과 10여 명의 전직 정상이 집결했다. 이는 유래없는 최대의 영결식이었다. 거리에는 만델라가 그토록 원하던 화합의 물결, 흑인·백인· 동양인 인종과 종교를 넘어 모두가 함께 "마디바"(존경받는 어른)를 외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가 떠나고 없는 지금도 그의 용서와 화해의 정신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 살아 숨쉬며 싹을 틔우고 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계속 상처를 안고 과거에 멈춰있을지,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앞으로 나아갈지. 상처를 끌어안고 산다는 것은 그 대상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끔찍하지 않은가.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27년간 옥중에서 자신을 가두었던 정부를 향해 증오와 복수심을 품었다면 그는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을 절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고통과 아픔으로 얼룩져 애초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지 모른다. 증오와 복수심으로 얻을 수 있는 결과는 확실히 정해져 있다. 더 큰 증오와 복수 뿐이다.
KBS스페셜 ‘마음’ <당신을 용서합니다 >편에서 1995년 일어난 ‘오클라호마 시티 폭파사고’ 피해자 가족 ‘버드웰치’씨의 이야기가 소개됐다. 그 폭파사고로 168명이 사망하고 850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고당시 ‘버드웰치’ 씨는 사랑하는 딸 ‘쥴리’를 잃었다. 그 후 2001년 6월 폭파범 ‘티모시 멕베이’의 사형은 집행이 됐다. 그가 사형됐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위안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폭파범이 죽고 4개월이 지났을 때 그는 한 피해자의 어머니를 만나게 됐는데 그녀도 역시 폭파범의 죽음으로 전혀 위안을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들 뿐 아니라 피해자 가족의 절반이 그의 사형 뒤에도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고 한다.
‘버드웰치‘씨는 그 후로 4년의 방황 끝에서야 마음의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폭파범을 용서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폭파범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을 위해서 용서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에 평온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모든 것은 내 마음 안에서 시작되고 끝이 난다. 폭파범이 사형됐다고 해도 마음 안에서 계속 증오하고 원망하는 이상 고통은 끝이 나지 않는다. 용서가 바로 진정으로 딸을 위한 것이다. 딸을 사고라는 기억에 가두어 두는 한 그녀는 영원히 고통, 불행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과연 그것이 모두에게 최선일까?
두 사람은 분명 행복하고 아름다운 기억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폭파범에 대한 증오로 그녀와 폭파범을 묶어놓는다면 그녀는 영원히 사고, 고통, 피해자라는 이미지와 수식어로 존재하게 된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증오와 원망일까? 이것은 자신 역시 그 순간에 꽁꽁 묶여 갇혀있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신의 마음 안에 셋이 함께 부둥켜안고 살고 있는 셈이다. 모두를 위해 놓아야 한다. 용서하고 좋았던, 아름다웠던 기억 속에 자신과 딸을 함께 풀어주어야 한다.
위의 사례처럼 누군가의 가해나 사고로 가족을 잃는 경우 외부에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기도 하지만 자신을 용서하고 이해해야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세상이나 타인에 대한 원망은 자신에 대한 자책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내가 지켜주지 못했다는 혹은 떠나간 사람에 대한 미안함으로 난 고통받아야하고 행복해지면 안 된다는 잘못된 믿음이 자리 잡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잠재의식에 깔리면 자신 뿐 아니라 모두 고통을 반복하며 살아가야 한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누군가로 인해 괴롭고 용서와 화해가 필요할 때 심리치료의 한 기법으로 ‘빈 의자 기법(empty chair)'을 활용하기도 한다. 사이코드라마의 이론가인 '모레노(Moreno)'가 창안을 하고 게슈탈트 이론가 '펄스(Perls)’가 발전을 시킨 기법이다. 이 기법은 자신의 앞에 빈 의자를 두고 자신과 상대방의 역할을 모두 경험해보며 상대방의 관점을 깊게 이해해 볼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모노드라마 기법이다. 다양한 심상화를 위한 역할극으로도 활용된다.
KBS스페셜 다큐 ‘마음’에서는 용서를 연구하는 미국 버지니아 주립대 심리학과 ‘에버렛 워딩턴(Everett Worthington Jr)’교수의 '빈 의자 기법'을 이용한 <용서> 실험을 소개했다. 청년 ‘크리스’는 술을 마시고 폭행했던 아버지를 빈 의자에 등장시켰다.
크리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정말 화가 나요. 아버지가 그러시면 안 되죠!
아버지(크리스): 나는 쓰레기야. 술에 취했었어. 그게 다야. 술에 취했었어.
그리고 나가라고 했는데 그땐 통제를 잃었었어. 상처 줘서 미안해...
크리스: 당신은 가치가 없어요. 술에 취했었어요. 언제나 술에 취해 있었어요.
그것이 항상 모든 것에 대한 변명이었죠...
아버지(크리스): 아들아 사랑한다. 상처를 줘서 미안하다.
그는 이런 말을 해 본 적이 없다며 눈물을 쏟았다.
이렇게 스스로 상대방역할을 해보며 자신과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게 되고 마음의 치유도 일어난다.
워딩턴 교수는 용서란,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인 감정으로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감정이입이나 이해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굳이 실제 빈 의자가 아닌 상상을 통해서 활용해볼 수 있다. 나를 괴롭혔던 친구라면 상상이든 인형을 두든 가상의 그 친구를 앞에 등장시킨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충분히 쏟아내 본다. 또한 자신이 친구의 입장으로 바꿔서 나에게 대답해본다. 상상이지만 우리 뇌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므로 실제와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가상현실 속에서 원없이 욕을 해도 좋고 충분히 복수를 해도 좋다. 하지만 복수는 단 한번으로 시원하게 하고 끝낸다고 생각해야 한다. 반복은 오히려 잠재의식에 복수를 심는 격이 된다.
나는 이 방법을 가끔 이용한다. 의자도 필요 없고 그냥 상상 속에 등장시키고 조금 웃긴 방법으로 풀고 정화한다. 물론 여러 번 해 보면서 발전했다.
예를 들면 말을 불쾌하게 한 사람의 경우 상상 속에서 입을 때리는 상상을 해 보곤 했다. 그런데 웃음이 터져버렸다. 의외로 짧은 시간에 해소가 되 버려서 그 뒤로 펜더 눈을 만든다든지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하는 상상 또는 머리카락을 황비홍이나 폭탄머리로 만들어버리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오락기구 ‘두더지잡기’에 접목시킨 상상을 하며 뿅망치로 시원하게 두들겨보기도 했다. 모두 다 속 시원하면서 끝은 묘하게 웃음이 터지는 효과가 있었다. 초기에는 욕을 해 보거나 진지한 상상을 해봤는데 찝찝하기만 하고 감정적으로 잘 승화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건강한 해소를 위해 욕을 하던 어떤 상상을 하던 마무리는 꼭 서로 미소를 짓거나 화해를 하는 상상 등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감정이 긍정적으로 마무리되고 정화에도 좋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