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함께했던 여섯 살의 티타임
홍콩에서 일 년 중 제일 날씨가 좋은 11월인데, 이번주는 내내 태풍과 비소식이 가득이다. 우중충한 하늘이 약간은 아쉽지도 하지만 차분한 회빛의 하늘과 거실 창밖으로 보이는 하얀 안개더미가 외려 마음을 따뜻하게 토닥여주는 기분이 든다. 평소 화창한 날 바다 건너에 보이는 높은 빌딩 숲의 전경도 멋지긴 하지만 때론 좀 차갑다거나 내 일상과 동떨어져서 다른 시공간 같은 생경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데 오늘은 새카만 새벽에 창밖의 시야가 온통 새하얀 안개로 뽀얗게 뒤덮여있는 걸 보자 마음이 놀랍도록 편해졌다.
무슨 감정의 연결고리인지 불현듯 대여섯 살쯤 할머니가 믹스커피를 타드실 때 내게 가끔 만들어주셨던 달달한 프리마커피와 에이스 과자가 생각났다. 인스턴트커피가루 두 스푼, 하얀 프리마 두 스푼, 설탕 두 스푼. 보기만 해도 달달한 그 마법의 가루들을 넣고 주전자에서 팔팔 끓는 물을 신중하게 조금만 붓고, 칠이 벗겨진 은색 티스푼으로 달그락달그락 저어서 한잔씩 홀짝이던 할머니의 모습이 어찌나 행복해 보였던지. 삼십 년 전 기억인데도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끓어올랐던 커피포트의 소리와 할머니와 내가 머물렀던 작은 주방 공간을 가득 채웠던 따뜻한 공기가 참 또렷하게 남아있다. 오전 열시나 열한 시쯤 아침 설거지나 청소를 마치고 잠시 숨 돌리며 종알종알 에너지가 넘치는 미취학의 작은 손녀를 앞에 두고 마시는 커피의 단 맛이란. 마셔보지 않았지만 내 혀가 당연히 알 것 같은 맛. 그 손녀는 매번 티스푼을 뺏어 들고 내가 저어보겠다며 용을 썼고 할머니는 다섯 번에 한번쯤은 몸에 좋지는 않지만 너도 함께 티타임의 즐거움을 누려보라며 프리마에 설탕만 탄 하얀 커피를 타주셨다. 작은 커피잔에 담긴 행복이 너무도 좋고 기뻐서 핼금핼금 아껴먹느라 거의 혀로 핥아먹는 지경이었다.
할머니가 기분이 조금 더 좋으신 날엔 에이스과자 다섯 조각이 사이드로 나왔다. 할머니 다섯 조각, 나 다섯 조각. 우리는 에이스 열 조각으로 덧셈 뺄셈 연습도 하고 커피를 마시다 말고 벽시계를 내려서 시계 읽는 연습도 했다. 에이스 귀퉁이를 커피에 적셔서 먹는 할머니를 보곤 어린 마음에도 '이렇게 맛있게 먹는 방법이!' 라며 굉장히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놀랐던 기억이 난다. 우리 할머니는 성격이 좀 예민한 편이셨고 식단이나 건강에도 꽤 엄격한 기준이 있으셔서 매번 '이거 몸에 되게 안 좋은 거라 자주 먹으면 안 돼'라고 하셨지만 매번 하얀 프리마 거품을 입가에 담뿍 묻히고 헤시시 웃는 손녀를 보며 늘 활짝 웃으셨다.
일주일에 한 번쯤 돌아왔던 할머니와 나의 티타임. 나에게는 이렇게 삼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세차게 내리는 비를 보며 떠올리는 달달했던 시간일지 모르겠지만 할머니에게는 쌉쌀했던 노동의 기억 한 조각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다섯 자녀를 겨우 출가시키고 나서 한숨 돌리자마자 큰아들 내외가 맡기고 간 어린 손녀를 주양육자로 돌보는 황혼 육아는 정서적인 사랑스러움과 별개로 버거운 것이 당연한 현실이므로. 할머니의 예민함이 어린 나를 속상함의 구덩이로 파묻었던 기억도 분명 있었지만 대여섯 살 무렵 언저리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저 달달한 프리마커피의 기억이 삼십 년의 세월을 뚫고 나타난 것을 보면 할머니에게 고마운 시간이 더 많았던 것이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명상을 하며 이런저런 마음의 어려움을 헤쳐나가려고 하는 요즘, 나에게로 향하는 많은 도움의 메시지들은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 '현재의 행복에 집중해라.' 그래서 최근의 나는 눈을 떴을 때 오늘 어떻게 행복하게 보낼지에만 모든 노력을 기울이려고 온 사력을 다한다. 그러다 보니 폐허 같은 전쟁의 더미 속에서 잊고 있었던 달달한 순간들이 고개를 내민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주 어린 날의 기억은 얼마나 강렬하고 강력하게 내내 삶의 궤적에 남아서 기쁨과 슬픔의 초석이 되었는지 깨닫게 된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들이 저 추억들의 합이구나 하는 깨달음. 나를 버티게 하는 것도, 부족함을 돌아보고 온전치 못한 인간임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게 하는 것도 할짝대며 아껴먹었던 프리마의 달콤한 기억. 나는 그토록 순수한 아이였고, 무언가를 목적 없이 좋아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좋아하는 걸 아낄 줄 아는 그런 사람.
현재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믹스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달달한 팜유 섞인 우유맛을 좋아했던 어린이는 이제 씁쓸한 블랙커피를 더 선호하는 중년의 어른이 되어 뭘 간절히 좋아했던 기억을 자꾸만 잊어간다. 프리마와 에이스과자를 떠올리고 입맛을 다시며 현재의 행복에 집중하는 방법 하나를 떠올렸다. 내가 좋아했던 것들, 내 취향이었던 것들, 내 스타일이라고 새롭게 정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기. 꽤 오랜 시간 내 자아를 누르고 돌보지 않은 것이 타인에 대한 배려이고 모두를 위한 효율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결국엔 나와 주변에 대해 동률적으로 무덤덤해지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나와 타인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내가 먼저 달달해져야겠다.
현재의 행복에 집중하라고 할 때는 약간 추상적이고 막막했는데 달달해질 일을 찾으려고 하니 무언가 마음이 들뜬다. 쉽게 찾을 수 없을지는 몰라도 시도자체가 중요한 거니까 뭐. 일단은 Michael Buble의 크리스마스 캐럴부터 틀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