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같이 사라질 나의 오늘

오늘의 기록은 미래의 나에게 위로를 준다

by 김뚜라미

이십 대의 나에게 글쓰기는 감정 배설에 가까웠다. 할 얘기가 어찌나 많은지, 요동치는 감정들은 얼마나 초 단위로 생성되는지. 사랑과 미움, 또 사랑과 좌절, 또또 사랑과 번개 같은 행복이 삶을 집어삼킨 것처럼 반복됐다. 심심한 순간이 솔직히 한 순간도 없었다. 괴로움의 시간조차도 마음이 다채롭게 변화무쌍했다. 그 시절 나에겐 식욕, 수면욕 그리고 성공욕구조차 모두 후순위였다. 언제나 사랑의 마음이 내 가슴을 터지게 했다. 그만큼 도파민이 팡팡한 하루하루가 지속됐고 페이스북이든 혼자만 보는 일기장이든, 휴대폰 메모장이든 물컹거리는 감정들로 넘실거렸다. 한치도 망설이지 않고 적어내렸고 어떨 때는 감정이 흘러 적셔지는 속도가 내 타이핑 속도보다 빨라서 벅찰 때도 있었다. 누가 불러주는 것처럼 그저 내 마음을 받아 적는데도 버거워서 '아 조금만 천천히'라고 했던 것도 같다.


그렇게 그 순간의 감정을 임금님 야사 적는 승지 느낌으로 받아 적을 땐 그것이 십 수년 후에 나의 평범하고 소중했던 하루를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가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어느덧 하루를 벅차게 했던 마음의 불꽃은 인사도 없이 잿덩이가 되어버렸고 매일의 일상이 지리하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새벽녘 무심코 휴대폰 잠금창에 툭 하고 올라온 7년 전, 10년 전, 15년 전의 글을 발견할 때면 당장 뛰러 나가고 싶을 정도로 심장이 뛴다. 유일한 자랑이었던 기억력마저 무뎌져서 솔직히 글을 썼던 시점의 감정이 너무도 생경할 때가 있다. 개별의 사건도 희미하고 진짜 내가 쓴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발랄하기도, 측은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 기록들은 공통적으로 모두 나에게 삶의 발자욱을 굳이 들춰내어 지금의 내가 빈껍데기가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별 다를 것 없는 매일을 사는 현재의 내가 나름대로 치열한 시간을 보냈고 물리적, 정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켜켜이 살아왔다는 위로를 준다.


그래서 오늘 일기 쓰기를 지루하다고 하는 딸아이에게 진심을 담아 일기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었다. 지난주 같은 요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우린 기억할 수 없다. 그렇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기록을 하면 네가 엄마 나이가 되어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2학년 6월 12일의 행복한 기분과 사건들을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고. 아직도 외할머니 집에는 엄마가 초등학교 6년간 쓴 일기들이 있고 엄마는 그걸 볼 때면 어린 시절의 엄마를 떠올릴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해줬다. 그래서 나도 오늘을 적는다. 비록 강력한 태풍을 하루 이틀 앞두고 엄청난 비바람이 몰아친 하루였지만 떡진 머리와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 무렵 아이 학교에서 열린 Art Walk에 가서 한 학기 동안 우리 딸과 반 친구들이 함께 작업한 그림과 벽화들, 글들을 보면서 너무 뭉클했다. 매일 집에 와서 '이런 이런 것들을 했어'라고 할 때 잘 이해되지 않던 작업들을 눈으로 보고 나니 내 딸의 행복했을 시간들이 느껴져 참 감사했고 이 학교에 머물시간이 끝나간다는 것이 사무치게 아쉽다는 감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일곱 살 인생이 이렇게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물들고 있다는 것이 다시금 또 소중하고 감사하다는 마음.


사실 딸아이에게 일기의 의미에 대해 본질적으로 설명해주고 싶어서 이야기하던 것이 내 일기가 되어버렸다. 그냥 쉬고 싶었지만 아이에게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기록은 내가 남길 수 있는 가장 신비한 기억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을 넘길 수가 없었다. 그저 잠만 자는 하루였대도 그 자체로 또 의미가 있는 일상이니 꼭 기록을 하고 넘어가리라 다짐한다.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는 것처럼 대단한 일은 아닐지라도 미래의 내가 이 기록으로 뿌듯하고 행복하게 아련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기꺼이 오늘을 적어내리. 아 오늘은 곧 홍콩을 떠나는 소중한 언니와 이 동네에서 제일 비싼 돈까스집에 가서 맛난 점심을 먹은 것이 또 중요한 사건이지.


오늘이 금요일인 줄 알고 참았던 와인을 마셨는데, 오후 11시 33분이 되었으니 내일 새벽기상을 위해 얼른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내일은 어떤 일이 또 벌어질까. 기록을 하다 보니 갑자기 다음날이 기대된다. 단 한 번이라도 웃을 수 있으면 성공한 하루.


오늘 하루 수고한 나 자신 굿나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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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힘쓴 우리의 오늘,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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