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치는 태풍 때문에 전쟁처럼 마트를 털지만, 동시에 일상이 유지되는 곳
홍콩에 온 첫 해에 태풍 10호가 왔었다. 비와 태풍이 잦은 홍콩에서는 누구나 휴대폰에 기상청 앱을 깔고 하루에도 수십 번 울리는 알림을 주의 깊게 살핀다. 태풍과 비, 각각의 강도에 따라 예보를 발령하는데 태풍의 경우 숫자가 올라갈수록 상황이 심각함을 뜻한다. T1, T3, T8, T10, T12 등. T8부터는 학교도 회사도 가게들도 모두 문을 닫는다. 내가 경험했던 10호 태풍은 너무 충격적으로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왜 창문에 다들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마스킹 테이프를 X자로 덕지덕지 붙이는지가 이해 가는 바람, 이라고 쓰고 괴물이라 읽는다. 이중창이 없는 홍콩의 홑겹 창문 유리가 마치 셀로판지처럼 구불거리며 쾅 쾅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바람을 온몸으로 보여줬던 그날밤. 유리창이 깨질까 봐 계속 초조하게 지켜보다가 새벽 2시쯤 커튼을 꾹 잠궈닫아 만에 하나라도 유리파편이 사람에게 덮치지 않도록 대비하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잠들었다.
그런데 그때보다 더 센 태풍이 몰려온다는 예보가 지난주부터 계속 들려왔다. 길에서도 집에서도 만나기만 하면 모두가 바이럴처럼 날씨에 대해 떠들어댔다. 아이 엄마들은 태풍이나 폭우가 오기도 전부터 휴교령을 이틀이나 내린 교육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공동육아를 계획하고, 필리핀 헬퍼들은 종일 바삐 움직이며 식재료를 쟁여 날랐다. 오늘 오후가 태풍의 눈이 홍콩에 도착하는 디데이였고, 학교는 충분히 ZOOM 수업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자율학습을 허하여 엄마들의 원성을 한 몸에 받았다. 말이 자율학습이지 집집마다 뒹구는 아이들은 삼삼오오 우리 집, 너희 집으로 옮겨 다니며 하루 종일 놀았다. 하루 종일 비는 단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고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더위만이 가득했다. 역시나 선제적이어도 너무 선제적이었던 휴교령이었다. 이른 아침시간부터 우리 집에 와서 소리 지르며 놀던 아이와 친구들이 오히려 오늘 왜 학교를 못 가냐고 나에게 물어볼 지경. 나는 개인적으로는 어쩌다 학교 안 가는 날이 생기면 아이에게 늦잠을 푹 재울 수 있어서 좋았다. 또 빼곡한 방과 후 일정들을 넉넉하게 조정할 수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내일이 태풍의 영향권이 제일 심한 날이라 하여 예정된 피아노 수업을 오늘 오전으로 당겼다. 부담스러운 숙제를 미리 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아이가 피아노 레슨을 받는 동안 내일 집콕을 대비하여 운동을 하러 나섰다. 아파트 gym으로 갈까 하다가 오래간만에 부는 선선한 바람이 좋아 도로로 나섰다. 며칠 전부터 분주했던 동네 마트 앞과 계산대는 긴 줄로 뒤엉켜있었다. 동네 빵집과 편의점 앞도 흡사 어릴 때 북한이 침공한다는 출처 없는 소문이 돌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음식물을 쓸어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길어야 이틀 정도면 끝날 태풍이 뭐라고 여기가 섬도 아니고 도시 한복판인데 왜 이렇게들 난리지,라는 냉소적인 생각이 들었다. 추석이나 새해 명절을 앞두고도 이 정도로 북적이지는 않는데 다들 악다구니를 쓰듯 식료품을 털어가는 모습이 내 눈에는 과해 보였다. 마트를 둘러싼 인파를 벗어나 뛰기 시작했다. 필리핀에서부터 올라오는 태풍 Ragasa에 대한 정부 차원의 경고가 어찌나 삼엄했던지 교통량 많은 도로에 차도, 사람도 없었다. 덕분에 평소보다 쾌적하게 뛸 수 있었다. 주변에 가득하던 대형견 산책무리나 걸어서 등교하는 꼬마들, 운동하는 사람들이 현저히 줄어들어 텅 빈 산책로를 보며 뜬금없이 이 나라에서 태풍이란, 마치 어떤 구복신앙이나 명절만큼 모두가 북적거리며 떠들고 준비하는 풍습의 하나처럼 느껴졌다. 적당히 상황 보며 예보를 발령해도 되지만 섬이나 외곽 해안지역에 사는 주민들까지 아울러 국가 비상사태에 준한 경보를 울리는 정부와 그에 장단 맞춰 온 마트를 쓸어 담는 사람들. 그리고 몇 날 며칠을 마치 재밌는 범국가적 가십처럼 태풍의 움직임을 입에서 입으로 전달하는 모습들이 순간 굉장히 정겨웠다. 중국, 홍콩, 마카오 천문대가 주변국들과의 공조로 AI 기술까지 이용하여 태풍을 예측한다는 2025년에 , 깍쟁이 같은 도시 홍콩에 마지막으로 남은 아날로그 감성 한 스푼이 이런 느낌일까.
뻥 뚫린 길을 유유자적 뛰고 있는데 길 건너에서 엄마 손을 붙잡고 생일파티에 가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좀 더 울창한 산책로를 지나다 보니 온 가족이 이른 아침 하이킹을 마치고 하산하는 것도 목격했다. 항상 반환점으로 삼는 공원에 도착하니 홍콩로컬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웨스턴 가족들이 각각 배드민턴과 공놀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한쪽에서는 마트 매대가 동날 정도로 식료품을 쓸어 담고 건물마다 마스킹 테이프를 붙이느라 철물점과 문방구의 테이프가 고가에 거래되고 있는데 여전히 일상은 느린 비디오테이프처럼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 <미드 나잇 앤 파리>를 연출한 우디앨런 영화 같기도 했다. 동 시간, 같은 공간인데 너무도 이질적인 모습들. 결정적으로 돌아오는 길 동네 카페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호호 할머니 무리를 보며 태풍전야에 루틴 지키겠다고 뛰러 나온 나나 할머니들이나 참 한결같다 싶었다. 모두의 한결같음과 호들갑스럽게 태풍을 대비하는 모습이 뒤엉켜 참으로 정겹다고 생각됐다.
10호 태풍을 앞두고 피아노 레슨도 받고, 동네 꼬맹이들 다 모여서 놀이터에서 놀고, 식료품 털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긴 이틀이 될 거라며 와인과 위스키를 슬쩍 쟁이는 모습들 모두 너무도 홍콩스러워서 이 모습들을 긍정하게 된 오늘. 밤 10시 30분이 지난 지금도 비는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교민방에서 이런저런 태풍의 소식이 들려온다. 작은 홍콩이지만 귀신 우는 것 같은 바람 소리가 거세게 난다는 얘기도 있고, 반대로 아직도 반려견과 산책을 하고 조깅을 한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아무 피해가 없을 것 같이 맑던 우리 동네에도 천둥번개를 동반한 굉음이 점점 커진다. 비가 창문을 때리고 바람이 또 한 번 후려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온 토네이도가 이런 느낌일까.
불안해지는 마음을 잠재우려 며칠 전 쟁여둔 와인 한잔을 하며 이번 태풍을 호기롭게 맞이한다. 이번 태풍도 호들갑 떤 것만큼 큰 피해가 없기를. 주변의 라마섬, 란타우 섬 같이 울창한 자연으로 둘러싸인 시골 지역들도 무사히 안녕하기를. 오늘, 내일 잘 버텨서 아무렇지 않은 척 우리 모두 지루하리만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나는 정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하루 이틀 홍콩에 정을 쌓고 있는 중인가 보다. 태풍을 준비하는 홍콩 사람들의, 정확히는 홍콩에 사는 모든 이들의 호들갑이 정다워지는 날이 오다니.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더 커지기 전에 잠들 수 있기를.
모두 굿 나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