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BX 사이에서 방황하는 디자이너들에게
10년 차 디자이너를 바라보는 저는 재미없게도 4년제 디자인 대학을 나와 그대로 디자이너가 되어 지금까지도 디자이너입니다. 뜬금없지만, 저의 최애 소설 '파운틴 헤드'의 주인공 하워드 로크는 건축가입니다. 이 소설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간단히 '건축가, 하워드 로크'라고만 되어 있지. 하지만 이 명패는 사람들이 성문에 새기고 목숨을 바쳐 지키는 좌우명과도 같아. 이 명패는 너무도 엄청나고 암울한 것, 세상의 모든 고통, 세상에 얼마나 많은 고통이 있는지 아나? 자네가 직면하려는 일에서 오는 모든 고통에 대한 도전이지.
난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자네가 그걸 겪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네. 다만 자네가 그걸 겪으리란 것만은 알고 있지. 그리고 자네가 이 명패를 안고 끝까지 갈 수만 있다면 승리를 거두는 것이라는 사실도.
하워드, 그건 자네만의 승리가 아니라 꼭 이겨야만 하는 것, 세상을 움직이면서도 인정받지 못해 온 것의 승리이기도 하지. 자네의 승리는 앞으로 자네가 겪게 될 고통을 견디지 못해 쓰러져간 수많은 사람들의 정당성을 입증해 줄 것이네."
CPO/ PM/ PO/ CDO 멋들어진 직책 속에서도 저에게 가장 지키고 싶은 타이틀이 있다면 그것은 디자이너일 것입니다. 이쯤 되니 이제는 디자이너를 누가 봐도 멋진 직업군으로 인식시키고 싶은 사명감이 생기더라구요. 디자이너 출신의 ㅇㅇ들을 만나면 반갑기 그지없고요.
이번 칼럼에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시각 디자이너 출신들의 커리어 방향성입니다. 너무나 많은 선택지 속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어디에 타겟팅해야 할지, UX와 BX사이에서 방향 잡기 어려워하는 스타트업 디자이너, 이제 막 취업을 준비하는 졸업생분들을 위해 제가 앞서 경험했던 고민담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저는 매년 3만 8000여 명의 디자인 대학 졸업생이 배출되던 '디자이너 공급 폭발 시대' 출신입니다. 3만 8천이라는 숫자는 미국에 이어 2위라니, 당시 디자인학부의 인기가 대단했네요. 공급이 수요량을 초과하던 시대, 그러나 단순히 공급과 수요량에 근거해 디자이너의 처우를 평가하는 것은 연차가 높아지면 자연히 연봉도 높아져야 한다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가치관으로 시장을 바라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2020년 시각 디자이너의 첫 직장 월평균 임금은 133만 원으로 측정됩니다. 최저 시급제가 도입되기 전이니 지금은 최저 연봉인 2,300만 원 선이 평균이 될 것 같네요. 월 실수령액으로 따지면 170만 원 가량의 월급입니다. 유명한 에이전시에 들어가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암울합니다.
현재 여러분의 월급이 낮은 이유는 아래 글에서 제 의견을 풀어봤으니 관심이 있다면 참고해 주세요 :)
위 글은 (특히) 비즈니스 관점에서 현재의 연봉이 낮은 이유를 설명한 글입니다. 전반적인 회사와 시장의 사정을 이해한다면 디자이너의 초봉도 자연히 추억거리가 됩니다. 반대로, 디자이너가 레이아웃과 컬러, 타이포그래피만 신경 쓰고 있다면 그 자리에 머물게 되겠지요. 스스로를 포토샵, 일러를 다룰 줄 아는 웹디, 편디라고 지칭하시는 분들 중 연봉에 대한 고민 플러스 업계 욕 나아가 디자이너인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는 분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웹디, 편디라는 용어의 프레임에서 우선 탈출하시길 바랍니다.
평균 연봉은 어디까지나 평균일 뿐.
졸업생 중에서 1~2명은 선망되는 기업에 갑니다. 이 친구들은 자신의 전문성과 탁월함을 남들보다 비교적 빨리 알아내고 집중한 유형입니다. 이름 있는 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반드시 디자이너의 최종 goal이나 연봉의 최정점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전문성을 발견하고 집중하는 것- 그 단계별 루트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가 뭘까요? 저 또한 결정을 하지 못해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기 때문이죠. 핳핳 (어쩌면 지금도)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비전공자 출신 디자이너도 여러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전공자와 비전공자를 굳이 나누고 싶지 않지만 저 자신이 전공자 출신이다 보니 제 경험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학교에서는 이런 과목들을 배우게 되죠.
편집 디자인 / 로고 디자인 / GUI 디자인 / 패키지 디자인 / 광고 디자인 / 영상 디자인 / 포트폴리오 제작
수업명은 다를 수 있지만 분절된 영역에서 디자인의 기본을 학습한다는 기조는 라떼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분절된 디자인의 개별 영역에만 갇힌다면 로고 5만 원, 리플렛 10만 원으로 스스로의 몸값이 결정되고 맙니다. 자신에게 30분에 한 장씩 로고를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이 아무래도 생기지 않을 것 같다면, 통합된 디자인 영역으로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5만 원짜리 로고 이미지가 필요한 클라이언트가 아닌, 500만 원짜리 브랜드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클라이언트를 만나는 것이죠.
레이아웃 / 타이포그래피 / 컬러 / 이미지
분절된 디자인 각 영역의 정점에는 UX (유저 경험 디자인)과 BX (브랜드 경험 디자인)이 있습니다. 때로는 디자인의 기본이 없는 직군이 디자이너라는 명함을 들기도 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디자인은 최종 산출물이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합니다. 조형미를 추구하는 설계 행위인 디자인의 가장 하위 영역에는 레이아웃/타이포그래피/컬러/이미지가 있어요.
첫 회사를 에이전시로 선택하는 디자이너들은 레이아웃, 타이포그래피의 기본을 여기서 떼야해요. '시각 디자인'이라는 좁은 영역에서 정점을 찍고자 한다면 에이전시에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프로젝트 경험과 성취감은 디자인 그 자체로 재미를 줍니다. 그러나 서비스를 직업 개발하고, 시장의 반응을 살펴 개선해나가는 린 스타트업의 UX/BX 방법론은 현실적으로 에이전시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에이전시 디자이너는 디자인 영역에서는 top이지만 도메인에 대한 깊은 이해도와 경험, 비즈니스를 포함한 전략적 사고는 내부 디자이너에 비해 비교적 떨어지게 되죠. (내부 디자이너가 제대로 역할을 한다는 가정하) 결국 부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과 환경 면에서 연봉에 차이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UX : GUI 디자인 / 프로토타이핑 / 와이어프레임 / 영상 (인터렉션) 디자인 / 컴포넌트 - GUI 시스템 가이드라인 / 데이터 산출 - 분석 / 온라인에 대한 이해
BX : 로고 디자인 / 패키지, 리플렛, 포스터, 굿즈 제작 / 브랜드 가이드라인 / 광고-마케팅 / 오프라인, 프로덕트 대량 생산에 대한 이해
공통 : 소비자 공감 - 커뮤니케이션 / 전략적 사고
위에서 나열했던 분절된 디자인 영역을 그룹핑해보면 위와 같습니다. UX로 예를 들자면 앱 화면 한 장 한 장을 장인 정신으로 예쁘게 그리는 것보다 동적 인터렉션을 고려한 디자인, 코딩에 대한 이해, 기초적인 개발 백그라운드 지식 및 이에 대응하는 GUI 시스템 가이드라인의 제작, 서비스 kpi를 세우고 개선할 부분을 찾아가는 전방위적인 서비스 디자인 정신이 필요해집니다.
BX를 예로 들자면 단편적인 로고 디자인은 한 장 짜리 이미지로 그치지만, 온/오프라인의 다양한 매체에서 사용되었을 때의 가이드, 최소-최대 사이즈 규정, 어떤 상황에서도 인지될 수 있는 시각적 보편성 및 응용 가이드, 다양한 어플리케이션에 적용했을 때 일관된 퀄리티 등이 고려되어야 해요. 여기에 전체 디자인 전략, 컬러 가이드, 타이포그래피 가이드, 마케팅 가이드 등이 '통합적'으로 디자인되어야 하죠.
저는 디자인의 여러 분야들이 다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8년 차까지도 UX/BX 중 어느 하나로 전문성을 좁히기가 어려웠어요. 브랜드 가이드라인을 만든 후 UI 컴포넌트를 만드는 크로스 업무가 저를 더 통합적인 디자이너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소심하게 믿어왔습니다만, 역시 7-8년 차부터는 하나로 결정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었습니다. 특히 a-b단계의 스타트업에 있는 디자이너들은 UX/BX를 넘나들며 디자인하기 때문에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C단계, 혹은 유니콘 기업은 UX나 BX팀이 분리되어 있고, 각 영역에서 전문성을 갖춘 사람을 우대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자신의 전문성을 어디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지 영 헷갈리시는 분들에게 힌트를 드려보겠습니다.
1. 당신은 숲파인가요 나무파인가요?
> 숲파라면 UX / 나무파라면 BX
숲 파는 논리 지향 디자인에 더 강합니다. 이유 있는 디자인을 선호하기 때문에 크리에이티브보다 전략적 사고에 더 강점이 있습니다. 반면 BX 영역은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감성을 추구합니다. 그래픽 표현에 강점이 있다면 BX 파트가 더 어울릴 수 있습니다.
2. 디자인이 좋다 vs 성과 지향적이다
> 누가 뭐래도 디자인이 좋다 BX /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는 것이 좋다 UX
시각 디자인 관점에서만 보면 BX는 확실히 UX의 상위 단계에 있습니다. 비주얼 브랜드 가이드라인을 바탕으로 UI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지기 때문이죠. 한편 브랜딩은 단기적인 성과 측정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OKR이나 KPI로도 측정하기 어려운, 인셉션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따라서 성과보다는 디자인 자체에 재미를 느끼는 분들에게 적합합니다.
반면, UX는 단기적입니다. DDUX (data driven ux)의 출현으로 전 과정에서 디자인의 성과 측정이 가능합니다. 목표를 세우고 눈에 보이는 결과에 재미를 느끼는 분들에게 좀 더 어울리는 영역입니다. 사내에서 좀 더 핵심적인 프로젝트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 이 또한 UX를 추천하겠습니다.
오늘은 디자이너의 방향성에 대해 글을 적어보았어요. 생각보다 길어졌습니다... 핳핳. 여기까지 읽어주신 열정 어린 디자이너 여러분, 저도 가끔씩 다른 브런치 전문 칼럼을 읽어보곤 하는데, 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 제가 잘 알아요. 유튜브 보며 시간 흘리기 대신 커리어 개발을 고민하고 있는 당신, 우선 칭찬합시다!
그래서 당신은 연봉이 많나요??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연봉 대신 디자이너의 다른 장점들을 말하고 싶어요. 글은 전체적으로 연봉, 몸 값 올리기에 초점을 맞춰서 썼지만 저는 제가 버는 돈에 대체로 만족하며 지냅니다.
장점을 한 번 써 볼까요?
1. 프로젝트 결과물을 남길 수 있다
2. 시간 관리를 내 맘대로 할 수 있다 (단, 성과는 철저히)
3. 업무 환경을 내가 컨트롤한다
4. 위 두 가지를 조합하여 경력 단절을 최소화할 수 있다. (30대 여자라면 누구나 하는 고민!)
5. 반드시 회사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
6. 플랫폼 비즈니스의 높은 부가가치 생산으로 일 하는 환경이 너무너무 좋아졌다. 내가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에이전시와 인하우스밖에 선택지가 없었는데, 스타트업 딱지를 뗀 유니콘 기업의 내부 디자인 팀을 인하우스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과거 인하우스와는 뉘앙스가 완전히 다르다. 과거의 인하우스는 하청 업무 관리가 주가 되었다면 지금은 디자인이 메인이 된다. 그만큼 비즈니스를 잘 이해하고 서비스를 기획할 수 있는 디자이너 출신이 업계 전반적으로 필요해졌다.
7. 6번을 확인할 수 있는 사안으로 연봉 9천 이상의 포지션을 제안받았다. 디자이너에게 배정된 연봉 테이블의 액수에 일단 놀라긴 했다.
연봉은 하나의 선택지일 뿐, 개개인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커리어 패스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사를 이탈하여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가는 디자이너도 있을 것이구요. 글을 쓰며 오랜만에 플러스엑스 포트폴리오를 보는데 G렸네요. 돈보다는 디자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않길. 오늘도 멋진 작품들을 스크롤하며 초심을 지켜내는 사람들을 경애의 눈으로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