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돌고 돌아 글을 쓰는 이유

내가 글을 쓰는 이유

by 정어리

글은 쌓는 즐거움이 있다. 자음과 모음을 두세 움큼 정도 통에 담아 놓고 생각대로 글자를 조립해서 블록을 쌓는 느낌이다. PC나 스마트폰의 액정화면 위에서부터 아래로 한 줄씩 글을 올린다. 3D 프린터가 한 층씩 적층하며 인쇄하듯이 글을 쓰면 완성본만큼의 면적이 내 것이 된다. 한 장 분량으로 적힌 글자의 합을 보면 '이만큼이 나의 것'이라는 소유감마저 든다. 바둑을 두고 나면 빈집을 계산하려고 상대의 집을 메운다. 흩어진 흑과 백이 단단하게 뭉치고 정리된다.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정돈하는 느낌이 좋다.


하루에 일정 분량 이상 말을 하지 않으면 답답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가끔 참았던 말을 쏟아내며 회의 시간에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기라도 하면 궁지에 몰린 느낌을 받는다. 나로서는 아무쪼록 '이런 사람도 있군' 하고 받아들여 주길 바랄 뿐이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요?"라고 묻는 말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나를 제대로 알아준다는 느낌마저 드는 탓에 오히려 좋다.


이런 나에게도 말하고 싶은 욕구는 당연히 있다. 정해진 말의 분량도 나름의 기준치가 있다. 단,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닐 뿐이다. 손가락으로 말하기를 선호한다. 하루에 이만큼은 써야 하는 말의 분량, 글자의 수량이 있다. 무형의 말은 보이지 않는다. 문자로 쓰는 글은 눈에 보인다. 쌀 한 되처럼 스쿱으로 푹푹 퍼서 되에 담아 저울 위에 올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하는 말하는 후련함을 느끼기 위해 오늘도 쓴다. 친구와 메신저로 수다 떠는 글, 웃긴 자료를 공유할 때 쓰는 URL 주소의 글자까지 합치면 3~4되 정도는 된다.


언어란 무엇인가에 대해 울림을 주었던 영화 콘택트(Arrival, 2017)를 생각해본다. 엄청나게 거대한 UFO 12기가 세계 각국 상공에 나타난다. 언어학자 루이스는 외계인과 의사소통을 시도한다. 처음에는 외계인의 언어를 적의로 오해하지만 결국 그들의 언어를 배우게 된다. 3천 년 후 미래에서 온 외계인들의 언어는 육성이 아닌 이미지였다. 그들 나름의 '글'이다.


사무실에서 1m 간격 너머에 선배를 두고 말하기보다 카카오톡을 쓰거나 메신저를 보내는 나는 선배에게 외계인 같은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굳이 말하기보다 모른 척 글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기승전결을 요약해서 결론까지 명확한 글을 쓰면 "쪽지를 보내드렸으니 확인해 주시라"는 한마디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선배님" / "응, 왜." / "땡땡 업체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 "거기? 그런데 왜?"


보통은 이런 식이다. 말이 많은 선배를 잘못 만나면 본론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진이 빠진다. 기승전결의 결을 맺고 마침표를 찍기가 무척 힘들다. 생각을 정리하지 않고 말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일수록 특히 피곤하다. 글은 잘 쓸수록 하나의 완성된 단위로 한 번에 많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말보다 뛰어나다.


반대로 글보다 말을 선호하는 사람은 메시지를 보내는 행위가 오히려 비효율적이라고 느낀다. 언제 다 쓰고 앉아있냐며 전화를 하거나 불러서 말한다. 나는 말하는 사람의 말을 다시 받아 적는다. 결국 돌고 돌아 글이다. 글이 편하고 확실하다. 이렇게 편리하고 효율적이라서 영화 콘택트에서도 3천 년 후의 미래에서 온 외계인이 말 대신 글로 소통하는 게 아닐까? 대신 상대방이 답답해 죽어도 글로만 소통하길 고집하는 '텍스트 빌런'은 진짜 외계인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글만 고집하면 민폐다.


내향성 99.9%인 나도 가끔은 좋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글이 9라면 나머지 1은 말을 해야 한다. 흰쌀이 9라면 나머지 1은 콩이나 현미를 조금 섞어서 지은 밥이 몸에도 좋은 이치라고 생각한다. 오로지 모니터 화면만 보고 꼼짝없이 일하다 동료와 잠깐 바람을 쐬며 이야기를 할 때 참았던 숨을 쉬는 수준의 후련함을 느끼기도 한다. 숨통이 트이면 다시 글을 쓰며 침전하고 싶다. 온종일 집에 있다가 햇볕을 쬐면 이롭다. 반대로 암막 커튼을 치고 숙면하는 휴식도 몸에 좋다. 내게 말이 햇빛이라면 글은 잠에 가깝다. 당신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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