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에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생활 리듬을 공유하는 집사와 고양이의 설 연휴

by 정어리

설날 전야에 밖이 깜깜해진 오후 8시 3분이 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외출한다. 비몽사몽 하다. 어젯밤부터 잠을 세 번 자서 그렇다. 전날 저녁과 아침 그리고 오후에 잤다. 종일 집에 잘 있다가 어디를 가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고양이가 지켜본다. 조금 전까지 뒹굴뒹굴할 때의 눈빛과는 확실히 다르다. 야행성 고양이 사과에게는 저녁이 아침이다. 습관처럼 아침에 사과 밥그릇을 내려놓으면서 아침을 먹으라고 말한다. 실은 사과에게는 아침이 저녁 식사다.


샤워만 겨우 하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바깥공기를 쐬러 나온다. 사과를 키운 이후로 가본 적 없는 장거리 여행을 하는 기분을 느낀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면 스페인 바르셀로나까지 17시간 45분 정도 걸린다. 직항 없이 경유 조건에 따라 20시간도 넘게 걸린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에는 기내식을 먹고 맥주나 와인을 달라고 해서 마신 다음 푹 잔다. 눈 뜨면 다음 식사를 준다. 뜨뜻한 물티슈로 손을 닦는다. 먹는다. 다시 잔다. 몽롱한 기분으로 먹고 자고를 반복한다. 현지에 도착하면 다시 시차 때문에 졸리다. 월급쟁이 직장인 집사에게 연휴란 고된 여행과 같다. 쉬고 있는데도 피곤한 휴식이다.


어떻게 낮과 밤이 순식간에 바뀔 수 있을까? 아내와 남편, 자식과 부모는 서로 닮는다. 반려동물과 집사도 서로 닮는다. 한 연구에 의하면 집사의 성격이 예민하고 소심하면 고양이의 성격도 겁이 많다고 한다. 단지 동물이 주인을 닮는 걸까? 집사도 반려동물을 닮는다. 우리는 원래 낮과 밤이 서로 뒤바뀐 룸메이트다. 가끔은 사과가 밤에 달그락 소리고 물건을 떨어뜨리는 소리를 내서 집사가 밤잠을 설친다. 반대로 사과도 집사가 유튜브를 틀거나 집안일을 하는 소리에 종종 잠을 설친다. 저녁에만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둘의 운명이다. 주말과 연휴에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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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거리 두기와 집콕이 숨 쉬듯 자연스러운 집사이기에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 날도 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집에 같이 있다 보면 성격은 물론 생활 리듬까지 비슷해진다. 평일이라면 보지 못할 ‘오전 8시 30분 이후의 사과’를 본다. 보통은 출근하는 집사를 궁금해하며 동그란 눈으로 쳐다본다. 잠자기 전에 사과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또랑또랑한 눈빛이다. 이후로는 달이 차면 기우듯이 눈이 점점 감긴다. 놀고 싶지만 아쉽게 자야 하는 어린이의 눈을 보는 것 같다. 잠깐 다른 일을 하다 사과를 보면 캣타워에 올라가 발을 뻗고 자고 있다. 햇볕에 널어놓은 솜이불 같은 모습을 보면 블라인드를 내리고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하게 된다. 덩달아 몸이 나른해지고 곧 낮잠을 잔다. 자다 일어나길 반복하면 밖이 어둑어둑하다.


남들 같으면 활발하게 활동하다 귀가할 시간에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은 묘하다. ‘이거 이렇게 대충 살아도 되나?’ 싶은 죄책감이 든다. 동시에 ‘제대로 쉬어야지 생각만 했는데 제대로 실천하니 다행이네.’ 하는 보람도 느낀다. 코로나로 웬만한 가게가 밤 9시에 문을 닫으므로 서둘러야 한다. 마트가 문 닫기 15분 전에 입장해서 조깅하듯 뛰어가 계란과 물걸레용 티슈를 사고 동네 은행 ATM기에도 들른다. 아이쇼핑을 잠깐 밖에 못해서 더욱 아쉽다. 폐점 시간이 지나면 할 게 없다. 밤 공항에 도착해서 숙소에 짐을 풀고 근처를 산책하던 때가 생각난다. 시차로 잠은 안 오고 정신은 또렷한데 현지 가게들은 일찍 문을 닫는다. 거리는 적막하다.


다시 숙소에 돌아온다. 스마트폰을 와이파이에 연결하고 느린 속도로 인터넷을 한다. TV를 틀고 채널을 돌려본다. 대충 감으로 내용을 짐작하다가 불을 끈다. 억지로라도 자야 할 것 같다. 내일은 미리 찾아둔 식당에 가고 유명한 카페에 들러서 커피도 마셔야겠다고 상상한다. 하고 싶은 일을 잔뜩 쌓아두고 잠드는 기분은 설렌다. 여행지에서의 첫날밤은 딱히 할 일이 없다. 비행기 안에서의 일상은 반복된다. 집사로서의 삶도 마찬가지로 평범하다. 내일 할 일은 사과에게 ‘아침 디너’를 서빙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아직 연휴가 많이 남아서인지 설렌다. 조용한 집에서 들리는 공기청정기 소리마저 항공기 소음을 떠올리게 한다. 자기 전에 산책을 한 번 더하고 싶다. 사과와 보낼 내일이 기대된다. 평범한 삶도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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