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커리어는 오늘도 이상 없습니다

저는 해양쓰레기 폐스티로폼이 아닌 친환경 플라스틱 직장인입니다.

by 정어리

“ㅇㅇ과장이 그렇게 글을 잘 쓴다며, 우리가 아주 기대가 커.” 실장님의 말씀을 들으며 멋쩍은 듯이 미소를 지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지. 코로나19가 아니었으면 옆에 있던 나는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는 듯한 억지 미소를 들킬 뻔했다. 회사에서는 매년 절반이 지나면 조직개편을 하고 인사발령을 낸다. 우리 팀에 새로 온 ㅇㅇ과장님은 나보다 훨씬 선배다. 육아휴직 전에도 사내에서 똑똑하고 글을 잘 쓰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어떻게 보더라도 CEO 스피치를 쓰는 자리에는 ㅇㅇ과장님이 어울린다. 스피치라이터란 ‘대통령의 글쓰기’를 쓴 강원국 작가처럼 각종 말씀의 초안을 쓰는 사람이다. 이제 어떡하나. 커리어가 끊기게 생겼다.


직무 순환제가 원칙인 공공기관 직장인의 삶이 ‘부표(buoy)’ 같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부표는 바다 양식장에서 굴이나 김을 물속에 매달아 기르기 위해 수면 위에 띄우는 스티로폼이나 플라스틱이다. 파도에 부딪혀 출렁거리면서도 식별할 수 있도록 같은 자리에 둥둥 떠 있다. 하루에도 수많은 일로 감정의 물결이 철썩이지만, 순응하고 타협하면서 제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직장인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나무처럼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하는 건 시스템이지 나라는 사람이 아니구나. 부표가 마모되고 분해되면 새것으로 교체해야 한다. 해양수산부에서는 장기적으로 양식장의 부표를 스티로폼에서 친환경 플라스틱으로 교체한다고 한다. 나는 부표가 아니었다. 부표는 출렁일지언정 제 자리에 있지만 직장인은 그렇지 않으니까.



‘스피치라이터 12 Pro, 더욱 프로다운 프로. 문장력 그 이상의 문장력. 5G 스피드. 직장인 사상 가장 빠른 A14 Human 칩. 4배 나은 학력과 경력까지. 이 모든 것을 담은 스피치라이터 12 Pro. 7월 1일부터 만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6월 30일까지 글을 쓰던 나는 11 버전의 구모델인 셈이다. 버전 12가 출시되자마자 매장 디스플레이에서 당장 사라져야 하는 존재다. 정 없는 느낌임에도 사람을 제품에 비유하게 된다. 얼마나 스펙이 뛰어난가를 나타내는 제품 사양처럼 비교가 되는 상황에서는 어떤 업무를 더 잘하는 사람이 그 일을 담당하는 방식이 합리적이다. 물론 일방적으로 아무 이야기 없이 담당업무가 바뀐 것은 아니다. 오히려 높으신 분들은 내 업무가 많은 점을 불쌍히 여기셨다. 배려 차원에서 글쓰기 업무를 덜어주시려는 의도였다. 새롭게 부서원의 업무를 정하는 날, 팀장님과 일대일 면담의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업무를 조정하려고 하는데 정우 씨 생각은 어때?” 팀장님이 빨간색으로 바뀐 부분이 표시된 업무 분장표를 보여주시면서 물었다. 사실 이런 질문을 받는 날이 올 줄을 알고 미리 생각해둔 이야기가 있었다.


‘저는 글 쓰는 업무를 담당하면서부터는 자비로 글쓰기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온라인 강의도 두세 개씩 신청해서 들었는데요. 유튜브 업무를 같이 맡고 나서는 관련 강의도 신청해서 팀 업무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지요. 이번에 글쓰기 업무에서 빠지고 새로운 업무를 담당하면 저는 또 관련 전문가 강의를 듣고 관련 책을 읽어서 배울 겁니다. 맡겨주신 일을 잘해서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요. 그에 못지않게 어느 한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그렇다고 원하는 업무를 붙잡고 놓지 않는다면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이겠지요. 토트넘 수비수가 손흥민 선수 포지션에서 공격하겠다고 요구한다면 감독은 난감할 테니까요.’ 이렇게 생각은 분명히 정리해놨는데 말을 못 했다. 차라리 미리 인쇄해서 질문을 받자마자 쓱 내밀걸. “네 알겠습니다. ㅇㅇ과장님이 오랜만에 복직하셔서 아직 적응 중이실 테니 글쓰기 업무가 몰리면 저도 보조로 도울게요.”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야 이 물렁한 사람아.



요즘 유로 2020 대회가 한창이다. 직장인은 인사철이 되면 다들 신통한 점쟁이가 된다. 이번 대회에는 점쟁이 문어에 이어서 어디 동물원에 있는 사자가 그렇게 족집게란다. “ㅇㅇ씨는 이번에 나갈 때 됐네. 가고 싶은 팀이 어디야?” 옆에서 지켜보는 수년간 한 번도 제대로 자신의 미래를 맞힌 적이 없던 A 선배가 다른 선배 B에게 본심을 물었던 적이 있었다. 담배를 피우다가 질문을 받은 B 선배는 “저는 어디에 가도 다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때 A 선배가 흡족한 표정으로 한 말을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방금 B가 한 말이 가장 공무원다운 대답이야.”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어떻게 저렇게 순순히 고분고분한 마음으로 피동적으로 대답하는가 하고 생각했다. 질문했던 A 선배도 그렇게 대답하는 B 선배가 마치 참 (공무원도 아닌) 공공기관 직장인이라는 듯이 흐뭇하게 여기는지 궁금했다. 아무거나 좋다는 말은 좋아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과도 같은데. 직장인이 되고나서부터 사람들은 일의 좋고 싫음을 망각한다. 편하거나 어려운 일 두 가지만 있을 뿐이다. 좋아하는 일을 말하면 대한민국에 누가 적성을 고려해서 일하냐고 한다. 인사 시즌이 되면 격무부서로 발령 날까 봐 걱정한다. 상대적으로 일이 적은 부서에 가면 안도한다.


직무 순환제 조직에서는 누구도 지금 자리에서 직장생활을 마감할 거로 생각하지 않는다. 동시에 본인이라는 제품의 ‘출시 주기’가 몇 년 단위인지 생각하는 사람도 잘 없다.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고 예측할 수 없으니까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잘리는 일은 없으니까 이대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부서 이동을 생각할 때는 보통 지금 있는 팀의 사람이나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빨리 벗어나고 싶을 때 정도이다. 현재 직무에 만족하는 사람은 전문성을 쌓을 수 없으니 문제. 무언가 불만이 있는 사람은 인사철만 되면 인사이동을 기대하며 들떠 있으니 문제다.


2018년 한 취업포털에서 직장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에서는 응답자 479명 중 44.3%가 직무 순환제를 반대한다고 밝혔다. 주된 이유로는 전문성을 키우기 어렵고, 업무 생산성과 효율성이 떨어지며 혼란스럽다는 이유였다. 어느 블로그 기사에서는 직무순환제를 외국과 구분되는 한국기업의 특징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외국 기업에서 직무순환제를 시행하지 않는 이유는 한 분야의 전문가를 원하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결말이 정해져 있는 자리에서 경험은 쌓을 수 있겠지만, 3년 정도 이력을 갖고 스스로 전문가라고 말하기에는 아무래도 쑥스럽다. 유경험자 정도랄까.


이번 인사이동으로 보도자료 작성 – 스피치 라이팅이라는 ‘글’과 관련한 커리어 흐름이 끊겨버렸다. 이다음에는 어디서 글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까? 유튜브 원고 작성? SNS 짧은 글쓰기? 홈페이지 카피라이팅? 홍보팀에 있는 동안 일을 관통하는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이나모리 가즈오가 쓴 책 <왜 일하는가>를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허탈한 감정을 채우려고 종이 쇼핑백을 가득 채워서 심리와 일에 관한 책을 사 왔다. 책장에 다 꽂아두지 못해서 넘치는 책을 보노라면 ‘저 책 무더기 어딘가에 답이 있겠지.’ 하며 약간 안심이 된다. 직무 순환제 회사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초라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점과 점을 잇고 알아서 퍼스널 브랜딩을 하면서 스토리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 잘게 부스러지고 흩어지는 스티로폼 부표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거대한 그물에 달린 썩지 않는 친환경 부표였음을 깨닫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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