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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어리 Jan 09. 2022

화장실을 청소할 때는 클래식을 듣는 편입니다

피아노의 거장 조성진과 함께하는 가사(家事)의 기승전결

일어나고 싶지 않은 아침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자며 주말을 보내겠다는 저의 계획은 고작 5시간 47분 만에 깨져버렸습니다.  일어나자마자 침대부터 정리합니다. 미 해군대장 윌리엄 H. 맥레이븐 제독은 침대 정리라는 간단한 일을 행하는 것만으로 작은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제게 이불 개기란 노동의 시작을 알리는 리추얼에 가깝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기'라는 투 두 리스트를 성취하기란 이렇게 어려운가요?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화장실에 갑니다. 고양이 화장실에 쌓인 모래를 봉투에 퍽퍽 퍼담습니다. 남는 모래 없이 탈탈 털어 버립니다. 세정제를 칙칙 뿌립니다. 어김없이 이번에도 액체를 분사할 때마다 손잡이에서 세제가 새어 나와 손에 묻습니다. 시큼한 라벤더향 락스 냄새와 오렌지향 곰팡이 제거제 향기가 코를 찌릅니다. 박박 닦을 일만 남았습니다. 매달 돌아오는 화장실 청소 시간은 고됩니다. 모처럼의 주말인데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네요. 그래도 고양이는 사랑합니다. 힘든 건 힘든 겁니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인 게 인생이라면, 때로는 3인칭 관찰자가 되렵니다. 조금 떨어져서 자기 삶을 조망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은 것 같습니다. 눈앞의 문제에 집중할수록 스트레스만 받을 것 같아서요. 이럴 때를 대비해서 JBL에서 만든 Flip 5 블루투스 스피커를 사두길 잘했습니다. 아침 7시부터 가사 노동을 하는 삶도 멀리서 보면 다큐멘터리요, 배경음악을 깔면 시트콤일 테지요. 그렇지만 억지로 힘을 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말하자면 오늘은 'Bon jovi'의 'Livin' On A Prayer' 같은 음악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힘들어도 사랑으로 열심히 살아요!'라는 커플에게 "예,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예요! 아니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라고 대답하고 싶은 아침입니다.


수건으로 손을 닦고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합니다. 첫 곡은 베토벤의 비창 2악장(Beethoven Sonata No.8 In C Minor, Op.13 'Pathetique' 2nd mov)입니다. 섬세한 피아노 건반음을 BGM 삼아 청소솔로 고양이 화장실 바닥과 벽을 벅벅 문지릅니다. 처음부터 욕심내서 물을 많이 뿌리면 오히려 헹구는데 오래 걸립니다. 적은 물기로 적당히 거품을 내서 빠르게 닦습니다. 온수로 몇 번 헹구고 수분기가 없어질 때까지 키친 타올로 닦습니다. 이왕 청소하는 김에 한 주 내내 방치해둔 샤워부스도 청소합니다.


아무리 신경 써서 닦아도 곰팡이가 거뭇거뭇한 타일 줄눈을 쓱싹쓱싹 닦습니다. 배수구를 청소할 때는 살짝 숨을 참으면 비위가 덜 상합니다. 발바닥은 이미 축축하게 젖었습니다. 마침 들리는 '라벨의 물의 유희(Ravel Jeux D'Eau)'가 잘 어울리는 풍경이네요. 샤워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군데군데 불순물이 보입니다. 다음 달엔 필터와 헤드를 싹 갈아야겠습니다. 잘 말린 고양이 화장실에 두부 모래 2팩을 싹둑 잘라서 붓습니다. '쏴아아' 모래를 채우는 이 순간만큼은 보람을 느낍니다. 닫아놨던 욕실 문을 활짝 열고 손님맞이 준비를 마칩니다.


'침대부터 정리하라'라는 책을 쓰신 맥레이븐 제독님께. 저는 '고양이 화장실부터 청소하라'라고 감히 말해봅니다. 고양이 화장실 물청소를 해낸 사람이 남은 일요일에 이겨내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내친김에 욕실까지 청소할 수 있으니 좋고요. 가사를 마칠 때쯤에는 '쇼팽의 스케르초 2번(Chopin Scherzo No.2 in B Flat Minor, Op. 31)'도 거의 끝나가고 긴장했던 몸의 근육도 조금 이완됨을 느낍니다.

 

최소한의 생활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주말 청소라도 유독 내키지 않는 날이 있지요. 오늘 같은 날처럼요. 그럴 때 저는 클래식을 듣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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