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와 3 사이에서 붕 뜬 삶
"까놓고 말해서 ○○ 다녔다고 누가 알아줘? 이제는 어디 밖에 나가서 다른 회사로 이직하기에도 적은 나이가 아니잖아."
금요일 퇴근길에 타 부서 팀장님을 만나 5호선 군자역까지 동행하며 우리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날이 오면 회사를 따라서 서울 월세방을 처분하고 지금보다 남쪽에 가까운 중부지방으로 내려가야 할지도 모른다. 팀장님은 이어서 말했다.
"회사가 이전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가족들 데리고 같이 내려가서 살겠어? 나 혼자 회사 앞에 방 얻어서 주중에는 그렇게 살다가 주말 되면 올라가겠지. 기러기 생활하겠지. 그럼 매달 월세 나가지. 퇴근하면 회사 사람끼리 술 마시거나 하다가 출근하는 게 일상이 되겠지."
"맞아요. 콜록콜록"
코로나로 얻은 기침이 완전히 낫질 않았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나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유독 잔기침이 잦다. 어쩌면 ‘이렇게 기침이 나고 목이 안 좋으니 대화를 끝내야 합니다.’라는 비언어적 표현을 하기 위한 인간의 진화가 아닐까. 주말을 앞둔 퇴근길에 팀장님의 푸념 버튼을 누를 계획은 없었다. 팀장님이 먼저 나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봤을 때 정우는 결혼할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어. 이제 너도 결혼해야지."
마치 수입차 네이버 카페 동호회원에게 차를 바꾸라는 권유를 받는 기분이 든다.
"지금 타고 있는 차도 좋은데요. 페라리 488 스파이더도 타보면 얼마나 괜찮은지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 슬슬 새 차로 바꾸셔야죠."
공식 수입 딜러사 직원이 아니라 동호회 회원이 말한다는 게 포인트다. 페라리, 람보르기니, 포르쉐 같은 스포츠카를 타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다. 이게 내가 기혼자들을 보는 시각이다. (그러고 보니 팀장님은 10년 된 차도 이제 바꿀 때가 되지 않았냐는 말도 잊지 않았다.)
어떤 화제가 내 쪽으로 넘어왔을 때 좋은 방법. 일단 받는다.
"그러게요…."
테니스에 비유하면 코트에 넘어온 공이 한 번 튕길 때까지 받아준다. 그다음엔 선택의 문제다. 상대가 던진 화제를 그대로 문다. 볼이 날아온 방향 그대로 받아치는 방법이다. 결혼에 관한 생각과 현재 처지를 구구절절 밝힌다. 또는 '우리 모두의 문제'로 화제를 돌리는 방법, 상대가 서브를 넣은 사선 방향으로 쳐내는 전략이 있다.(미리 밝히지만 테니스 규칙 같은 건 잘 모른다.)
지루하고 끔찍한 랠리를 이어갈 수는 없지. 후자를 선택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 그야 미래가 불안정하니까요."
뭐 아무래도 좋다. 결혼 이야기보다는 차라리 마음이 편하고 피부에 와닿는다. 당장 이번 달에는 누가 나보다 먼저 승진할까? 두 달 뒤 정기 인사 때는 어디로 발령이 나서 지금 일을 내려놓고 적응장애를 겪어야 할까? 잇몸이 약해서 치아가 곧 빠질 것처럼 흔들흔들하는데 쫀득한 초코바를 베어 물고 싶은 생각이 들까?(절대로 추천하지 않는다.) 몇 달 후 출근길 뉴스에 ‘○○기관 연내 지방이전 확정’ 란 헤드라인이 선명하게 뜨면 어떡하지? 물론 실제로 퇴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이 많은 고민을 터놓지는 않았다.
10년 차 직원의 미래가 불안하다는 한 마디에 팀장님이 반응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느라고 너무 스트레스받을 필요는 없어. (걱정)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여기까지 말하고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면 ‘과연 나보다 십수 년 이상 삶을 경험한 어른은 일가족이 이미 서울에 자리를 잡았어도 안정감이 있구나.’라고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지금 이직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로 시작하는 그 뒤의 말은 없었더라면.
토요일 오전에 나 홀로 스타벅스에서 글을 쓰려다가도 온 회사 사람이 지역 내 유일한 지점에 옹기종기 모여 인사하느라 쫓기듯 짐을 싸서 나와야겠지 그곳에 가면. 옆 자리 여자가 남편에게 전화하며 갑오징어 택배가 잘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새벽 배송이 안 되는 곳에서는 부러워할 이야기가 되겠지 그곳에 가면. 끊어진 교정 장치를 붙이러 치과에 가려면 강남역까지 1350원인 지하철 요금이 9700원짜리 고속버스 요금이 되겠지 그곳에 가면.
안정감을 느낄 수 없는데 결혼은 무슨 결혼, 연애는 무슨 연애인가. 인구 950만 명이 사는 서울에서도 바닷속 어항에 사는 물고기 같이 붕 뜬 일상을 보내는 내가 3만 명도 안 되는 동네에서는 어떤 삶을 살까 하는 고민이 부유하며 좀처럼 가라앉질 않는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 머리로는 이해가 간다만…. 역시나 와닿지 않아서 그다지 소용없는 조언이다. 혹시 다음 주 금요일에도 팀장님과 군자역까지 동행해야 한다면, 그때도 똑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이렇게 대답해야겠다. 나는 지금 2와 3 사이에 있는 어중간한 처지라고.
"매슬로우의 인간 욕구 5단계 이론 중에 2단계인 '안전' 욕구가 아직 많이 부족해서요. 3단계인 '애정과 소속'으로 넘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