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7 KEYLAND ON: AND ON
한때 콘서트와 음반, LP 구매에 목숨 걸던 시절이 있다. 남들이 주로 소비하지 않는 장르를 탐구하고 새로운 인디 뮤지션을 치켜세우며 희소성을 갈구하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해외 인디 뮤지션이 내한 공연을 하면 홍대 벨로주든 무브홀이나 한남동도 늘 찾아갔다. 유일한 취미 생활이 음악 감상이고 그걸 부업으로 삼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창작에 대한 욕구, 마이너한 장르에 대한 호소 이런 건 사실 외면적인 목표다. 내면적으로는 소셜 미디어에서 보여줄 내 모습을 조금 더 그럴듯하고 이색적인 계정으로 꾸며야 했다. 근본적인 문제로 이상적인 가치 소비가 결여된 낭비벽과 수집에 대한 광적인 집착도 있었다. 주류 음악에서 탈피한다며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일본 음악 소비도 꾸준히 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회의가 든 건 바로 코로나 시국이 막을 열던 시기였다. 모든 것이 불가능했다.
2020년 3월 일본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일본 가수 호시노겐 팬미팅과 영국 밴드 포올스(FOALS)의 투어 티켓 두 장은 그야말로 휴지 조각이 되었다. 티켓을 가지고 어떻게 할 수도 없으니 환불도 못 받고 겨우 비행기와 호텔 값만 건졌다. 그나마 2월에 열렸던 일본 밴드 퍼퓸의 오사카 돔 투어는 주변의 눈치를 사며 조심스럽게 겨우 다녀왔다.
내한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고 본진인 윤하의 공연도 재개와 취소를 밥 먹듯이 반복했다. 인생에서 다시 공연을 가는 날이 올지에 대한 가능성도 거의 90%로 어려웠던 시절이다.
코로나로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부업으로 일하던 것도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덕업일치는 다시 상상 속으로 돌아갔고 새로운 음악을 디깅하는 것에 대한 흥미도 산산조각이 났다. 보복 소비와 투자, 코인에 대한 열풍이 끓어오르던 시기다. 공연도 못 가는데 음반에 투자할 관심도 사라지고 그 대안으로 의식주 소비 비율이 더 높아졌다.
음악을 듣는 재미가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흥미는 다시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다. 2세대 아이돌이 쏟아지고 수많은 명곡이 나오던 시기를 지나 외국 시장에 대한 열망을 띄고 날개를 펴는 3-4세대 아이돌 시장이 점차 주류로 상승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코로나 시국과 이어졌다.
그전까지 안 듣던 아이돌 음악을 닥치는 대로 들었다. 근래의 아이돌 음악은 해외 메인스트림 장르를 영리하게 가지고 와 변주하고 세련된 덧칠을 하거나 아예 자신만의 장르를 개척해서 밀고 나가는 고차원의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 타령이니 후크송이니 뭐니 하면서 음악을 저평가하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 오늘날의 음악은 한 가지 요소만 가지고 감상하고 평가하기에는 매력적인 장점이 너무 많다.
그중에는 고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좋아하던 샤이니가 있다. 남고를 진학한 나는, 남자 고등학생들 특유의 온갖 스테레오타입에 시달리고 그것에 적응하기 어려워 학교생활에 신물이 났다. 그 당시 남자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건 거의 매장이 가능한 사유였다. 남자는 여자 아이돌을 좋아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했다. 소녀시대나 원더걸스가 나오기 이전에는 윤하를 좋아한다는 것조차도 제일 친한 친구에게 말하기 조심스러워할 정도였다.
근본적으로 나는 SM 음악을 좋아한다. 물론 그 중심은 과거의 영광적인 SMP에 근거한다. 카세트테이프로 SES와 HOT를 들었다. 동방신기를 숨어서 듣던 시절을 지나 소녀시대에 이어 샤이니가 데뷔를 했다. 누나는 너무 예쁘다는 그들의 인사말은 사실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 시대 감성은 틀림없지만 감수성이 풍부하던 당시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컨템퍼러리 밴드라는 희소성을 개척한 샤이니가 본격적으로 마음에 들어온 건 ‘산소 같은 너’ - ‘아미고’ - ‘줄리엣’으로 이어진 1년 사이다. 본격적으로 SM에서 외국 음악을 가져와 한국스럽게 다듬던 시절이기도 하다. 이전까지 들어보지 못한 디스코 사운드, 귀에 박히는 그루브와 탄탄한 보컬 그리고 무엇보다 듣는 재미가 항상 있었다. 특히 ‘아미고’에서 키와 민호가 랩을 하고, 그 뒤에서 모두 화음까지 다해 자연스럽게 피치를 끓어올리는 파트는 가사의 기괴함을 다 뒤틀어버릴 정도로 흡인력 있다. (사랑해줄 멋진 男..) 무늬만 댄스곡이고 사실상 보컬 치트키 곡인 ‘Hello’도 있다.
태민, 종현의 솔로 활동도 좋았지만 나는 키의 솔로 데뷔를 제일 기다렸다. 보컬은 귀를 자연스럽게 환기하는 청량감과 귀가 편하게 듣는 단단함, 다른 보컬을 받쳐주는 안정감이 강점이라 어떤 노래에도 어울리고 곡에서 항상 배경과 주인공 역할을 모두 하는 역할이다. 랩이나 보컬이라는 포지션도 점차 사라지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예전에는 오토튠이 보컬에 많이 걸려서 요즘은 조금 듣기 거북한 노래도 있다.. 예를 들면 Wowowow)
‘센 척 안 해’는 샤이니 때부터 줄곧 하던 R&B 트랙이라 듣기 좋았다만 기대했던 청량감이 없어서 아쉬웠다. 오히려 ‘Forever Yours’도 비슷한 미니멀한 감성인데 당시 유행하던 트로피컬 하우스 위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운용해 듣는 재미가 더 있었다. 솔로 1집 <FACE>에서 ‘Imagine’, ‘Easy to Love’, ‘Honest’는 그런 변칙적인 전개가 두드러지게 표현된다.
일본 데뷔 앨범 <Hologram>부터 본격적으로 현재 키의 주체성이 보였다. 레트로 사운드에 대한 기대는 이에서 시작했다. 이번 콘서트에서 ‘Hologram’ 무대는 가히 공연의 절정이었다. 밴드 사운드를 최대한으로 사용하면서 쏟아내는 보컬, 역동적인 무대 전개와 리프팅까지 그 모든 게 공연의 분위기를 최대로 끓여올렸다.
그런 키의 군백기와 전역 그리고 나온 ‘Hate that…’에서 느껴진 ‘센 척 안 해’의 향기는 반가우면서도 아쉬웠다. 반대로 태연과의 예상치 못한 작업 덕분에 풍부한 화음도 들을 수 있으니 애정이 아직도 있다. 이런 스타일은 그리고 꾸준히 발매하고 있다.
레트로 3부작으로 알려진 ‘Bad Love’, ‘Gasoline’ 그리고 ‘Killer’는 키의 취향과 당시 메인스트림의 유행이 걸맞아 자연스럽고도 완벽한 전개였다. 그때의 무대 영상을 보면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당시 키가 보여준 레트로 넘버들은 하나같이 우리나라에서 깊게 파고들지 않던 영역이다. 남자 솔로 가수라고 하면 밴드나 발라드 가수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비주얼과 장르를 일체화해서 꾸민 댄스 가수는 아이돌 출신이 아니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총알같이 쏟아대면서도 샤이니 때부터 보여주던 그루브를 격정적인 멜로디에 녹여내 이국적인 사운드를 보여준 것이 참 신선했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트랙은 ‘Killer’다. 격정적인 전개와 싸비의 처연함은 고독감과 몽글몽글한 아련함까지 쏟아낸다. 이번 콘서트 각 파트의 메인이기도 했다.
샤이니의 키를 생각하고 온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분들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샤이니 노래는 하나도 안 했고 공연 게스트로도 나오지 않았다. 정규 앨범 2개에 미니 앨범이 3개나 있으니 단독 콘서트는 거뜬히 채울 수 있다.
타이틀 그 이상의 수려한 수록곡들이 있다. 자아의 이면을 끄집어내 너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Bound’는 명과 암이 공존하고 하이라이트까지 튀어 오르는 무대였다. 쏟아지는 조명에서 보깅 안무는 우아하면서 절박하기까지 하다. 레트로 타이틀과 같은 결의 ‘Another Life’와 ‘Yellow Tape’, ‘Saturday Night’은 극적으로 낭만적인 사이버 펑크를 추구한다. 최근 앨범 수록곡인 ‘Can’t Say Goodbye’와 ‘Intoxicating’까지 듣다 보면 키의 보컬은 참 신스 사운드에 잘 어울린다. 리드미컬한 멜로디에서 상쾌하고 서늘하게 튀어 오른다.
오늘 서울은 (진짜 이렇게) 하루 종일 시원하게 맑음이라면 키가 표현한 청량함은 ‘Helium’과 ‘Delight’에서 느낄 수 있다. 원숙한 완급조절과 무대 구성이 기억에 남는다. 그 완성은 가장 최근 타이틀곡 ‘Good & Great’이라고 확신한다. 묵직한 베이스는 굽은 몸을 일으키고 리드미컬한 피아노 멜로디는 팔과 다리를 움직이게 한다. 절정으로 키의 보컬이 정신을 깨운다. 감상만으로 이렇게 기분을 맑게 환기시켜주는 곡은 처음이다. 한동안 번아웃이 오고 몸도 마음도 무너지던 직장인 시절에 귀가 닳도록 들었다. 귀여운 안무는 덤이다.
이번 키 콘서트 공연을 한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은 참 콘서트하기 좋은 공연장이다. 메인 플로어가 가로로 넓어서 무대를 넓게 쓰기 좋다. 이를 십분 활용해 스크린을 여러 개 쌓고 겹쳐 블록 형태로 꾸미고, 자판기 콘셉트로 열고 닫으며 여러 미디어를 보여준 창의력에 박수를 보낸다. 거대 자본이 없다면 펼치기도 어렵겠다만 이런 기발한 상상력은 늘 기대하지 않아도 그 이상으로 보여주는 게 샤이니였고, 키였다.
선이 강하고 역동적인 무대가 많다 보니 그만큼 특수효과도 적재적소에 잘 터졌다. 공연의 완성은 조명과 여러 부수 무대장치라고 생각한다. 무대의 흥분을 관객과 일치시키는 순간은 폭죽이나 컨페티가 터지고, 가수를 쏟아지게 바라보는 핀 조명이나 화려한 특수효과가 담당해왔다. 그런 효과가 빈약하게 갖춰진 공연은 무언가 심심하고 때로는 그 가치가 조금 기대 이하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키의 공연은 그런 아쉬움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다른 공연에 대한 기대를 높여주었다. 이런 구성은 일본 콘서트에서 참 많이 봤는데, 일본 활동을 오래 해왔던 키여서 그런지 더 잘 활용하는 듯했다.
미디어에 많이 노출되는 키이지만 유독 그는 자신의 노래는 예능과 분리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대중픽은 아닌 모양이다. 이 노래 진짜 좋은데.. 해도 쇼츠나 릴스에서의 유행이 곡의 인기와 이어지는 요즘이고 장르의 특징도 유난히 손을 많이 타는 게 우리나라가 아닐까. 그런 키가 좋다. 앞으로도 음악과 예능 둘 다 놓지 않겠다는 그의 포부는 두 영역에 대한 자신의 겸손한 자신감과 앞으로 펼칠 이야기에 대한 신뢰를 크게 높여준다. 본인의 색깔과 흥미를 조화로이 담아내는 그의 활동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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