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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i 고나희 Oct 06. 2017

길 잃기에 완벽한 곳

<<여행의 취향>> 중에서

베네치아는 여실히 도시였다. 수많은 물길이 있는 물 위의 도시, 자연을 품은 도시였지만, 그럼에도 그곳의 정체성은 지극히 도시적이었다. 붐비는 사람들,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 번잡한 교통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이 향유하고 간직하는 문화가 베네치아는 대도시라는 걸 뚜렷이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도시를 좋아하는 여행자다. 누군가는 도시 여행을 즐기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자연스러운 풍경을 봐야지, 자연을 즐겨야지, 인공적이고 인조적인 걸 경험하다니, 늘 살아가는 곳이 도시면서 도시를 좋아하다니, 일상을 떠나 다른 것을 경험하는 게 여행인데… 라고. 하지만 나는 도시가 좋다. 도시 여행을 즐긴다.


도시를 좋아하는 건 사람을 좋아하는 데서 연유한다. 사람이 있고, 사람이 만든 풍경이 좋았다. 사람이 있는 마을, 도시, 공간이 흥미로웠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만든 건축물, 특히 중세와 근대의 건축물 그리고 사람의 문화와 역사를 담고 있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즐긴다. 더불어 일상과 여행이 괴리되는 것이 아닌 결국 같은 지점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여행이 일상을 닮아도 개의치 않는다. 나의 일상의 공간, 도시를 여행으로 다시금 대하는 게 즐겁다.


더구나 참으로 매력적인 도시가 아닌가. 도시민의 정체성을 가진 여행자가 물의 도시, 이탈리아의 대도시, 교통의 요충지로 여행한 때문이었을까. 그곳이 낯설지 않았다. 매력적이기까지 했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즐기는 데는 조건이 있다. ‘낯섦’이다. 낯설게 하기. 일상이나 여행이나 낯설고 신선하게 만드는 거다. 많은 이가 여행이란 익숙한 일상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낯설게 하기’ 라는 조건이 충족되면, 일상도 신선할 수 있다. 반대로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여행도 평범하고 무료할 수 있다.


베네치아는 이상하게 낯설지 않으면서도 매력적이었다. 그것은 물 때문이었다. 도시를 가르며 흐르는 물도 신기할진대, 물 위의 도시라니. 그거였다. 물이 이 도시에 낯선 시선을 주는 까닭이었다.


물, 골목, 도시. 베네치아는 나의 모든 취향을 담고 있는 곳이었다. 도착하는 순간 빠져버린 곳은 베네치아가 처음이었다. 피렌체를 떠나 해가 질 무렵, 물의 도시에 도착했다. 피렌체 숙소에서 우연히 대학동문 몇을 만나 베네치아에 대한 경험을 전해 들었다. 전공은 달랐지만, 타국 타지에서 동문을 만난 반가움에 여행일정과 기억을 나누었는데, 베네치아 일정이 더욱 길었으면, 하고 아쉬워하는 내게 그들은 “그거면 길게 있는 건데요, 뭘. 하루 이틀이면 충분한 곳이에요”라고 했다. ‘그것 참 다행이네’ 했던 생각은 도착하는 순간, ‘말도 안 돼!’로 바뀌었다. 도착과 동시에 아쉬움이 엄습했다.

느긋하게 길을 잃어보기로 했다. 골목골목 숨은 즐거움과 마주하기 위한 자발적 길 잃기를 감행하기로 했다. 말 그대로 감행이었다. 길치에 방향치인 나에게 ‘길 찾기’는 도전이고 모험인데, 반대로 무려 ‘길 잃기’라니. 다행이었던 건 이곳이 길을 잃을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거였다. 어디를 봐도 아름다움 그 이상의 풍경이 자리한 곳이니, 한순간 넋 놓고 있다 보면 어느새 길과 방향을 잃기 일쑤였다. 더욱 다행이었던 건 길이란 잃어도 결국은 맞닿아 있는 까닭이었다. 잃어버린 길 어느 곳에서든 새로운 즐거움이 있으니 행운이었다. 보이는 아름다운 면면을 즐기고 누리다 보면 잃었던 길도 금방 다시 찾는 기분이라 괜스레 안심이었다. 덕분에 길치 맞춤형 도시에서 매 순간 방심하며 길을 잃었다.


숙소를 나가 제일 먼저 만난 건 이탈리아를 처음으로 통일한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마상이다. 기마상 주변으로 가면과 열쇠고리 등을 파는 노점상이 있어, 작은 가면마그네틱과 열쇠고리를 샀다. 그리고 바닷가로 갔다. 뒤로 바다가 펼쳐지고 바다 건너편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Basilica di San Giorgio Maggiore)이 바라다보였다. 성당이 건너다보이는 자리, 배 몇 척이 서 있던 바닷가는 곧 베네치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 되었다.

바다를 왼편에 두고 좀 더 걸어가면 두깔레 궁(Palazzo Ducale)이 있다. 연분홍색의 궁은 베네치아의 푸른 하늘과 바다에 잘 어울렸다. 두깔레 궁을 오른쪽에 끼고 돌면, 베네치아의 거실이라 불리는 산 마르코 광장(San Marco Piazza)이 나타난다. 사람과 비둘기가 가득한 광장 입구에는 베네치아 사람들의 약속장소로 꼽히는 기둥 위의 사자상이 있다. 광장으로 들어섰다. 광장 안에 산 마르코 성당(Basilica San Marco)과 성당 종루가 자리하고 있다. 높은 종루에 오르면, 광장은 물론 바다 건너편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서기 828년부터 15세기까지 베네치아의 화려했던 시절을 대변하는 산 마르코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매우 화려하고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채색된 곳이다. 성당 상단부는 공사 중이었지만, 아치마다 그려진 상징적인 그림들은 그대로 남아, 공사 중인 성당의 단점을 보완하고 있었다. 성당을 어떻게 짓게 되었는지, 성경 속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들이었다. 대부분 금빛으로 꾸며진 성당 안으로 들어가 천장과 바닥을 보았다. 건축물을 볼 때 앞과 옆 외에 위와 아래를 꼭 보곤 하는데, 천장이나 바닥에서 자칫 놓칠 수 있었던 아름다운 그림, 조형물과 타일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들은 자연스레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 일부러 고개를 들거나 숙여서 봐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시야에서 벗어난, 낯선 느낌이자 뜻밖의 즐거움이다. 아름답고 정교한 모습의 바닥 타일과 그리스도와 성 마르코의 생애를 그린 벽면의 모자이크화가 눈에 들어왔다. 군데군데 많은 부분이 떨어지고 없어지고 마모됐지만, 이런 세월의 흔적이 작품에 깊이와 의미를 더해주었다.


제대 뒤에는 성 마르코의 유해가 있고, 별도의 입장료를 내고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면 성당 정면 상단에 장식된 네 마리의 청동 마상이 있는 테라스로 나갈 수 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달릴 듯이 서 있는 네 마리의 청동마상은 원래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것을 십자군이 여기로 가져온 것이다. 성당 정면 위쪽에 장식된 청동마상(테라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가짜이고, 진품은 안전하게 내부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 한때 나폴레옹이 이 마상을 파리의 뛸르리 공원에 있는 카루젤 개선문 위에 가져다 놓기도 했다는데, 말들의 움직임은 매우 역동적이고, 표정은 사실적이다.


성당을 나와 왼쪽에 있는 시계탑 아래로 갔다. 그곳의 아치를 통과하면 좁고 매력적인 골목 상점가가 이어진다. 사람의 물결에 치일 수밖에 없지만, 가면, 인형, 유리 제품 등 섬세하고 아름다운 수공예품들이 자리한 쇼윈도를 구경하다 보면 시간은 절로 간다. 베네치아의 상점이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서는 물길도 길이라서 상점의 진열장이 골목만이 아닌 수로를 향해서도 있다는 점이다. 물 옆의 쇼윈도, 물 옆의 테이블, 물 앞으로 난 문 등 물의 도시의 일상이 담뿍 느껴진다. 문밖이 바로 바다인 집은 대체 어떻게 나가는지. 비가 많이 내려 해수면이 높아지면 물이 자주 주택 안으로 넘치곤 하고, 건물마다 박아둔 나무를 정기적으로 교체해줘야 한다고 한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이런 불편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삶을 영위하고 있다.


상점가를 걷는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곤돌라를 타러 가는 게 분명했다. 베네치아 대운하에 들어서자 밀집해 있는 곤돌라와 베네치아 본섬 대운하에 놓인 세 개의 다리 중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가 보였다. 그 자리에는 본래 목조다리가 있었는데 석조 다리의 설계를 공모한 결과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제치고, 안토니오 다 뽄떼(Antonio da Ponte)의 설계가 채택돼 만들어졌다고 한다. 대운하에는 곤돌라 외에 다른 선박들도 많아서, 배에 실리길 기다리는 짐이 무척 많았다. 다리 위와 그 주변에는 상점과 행상이 밀집해 있어 베네치아가 상업의 중심지임을 알 수 있었다.

대운하 못미처 곤돌라들이 정박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곤돌라에 타기 위해서다. 곤돌라를 탈 수 있는 선착장이 베네치아에 꽤 많다. 도시 안쪽에서 탈 수도 있고, 바닷가 바로 앞에서도 탈 수 있다. 곤돌라는 타는 곳, 경로, 요금, 배 모양이 다양하다. 미리 자신의 여행일정을 점검하고 자신에게 맞는 경로와 요금을 정하고 골라 타는 게 좋다. 나는 베네치아에서 만난 네 명의 친구와 함께 매우 화려한 실내 장식의 짧은 코스를 도는 곤돌라를 총 요금 80유로에 탔다. 본래 곤돌라의 뒷좌석에는 사람이 앉고 앞좌석에는 짐을 싣는데, 요즘은 앞뒤를 포함해 4~5명의 사람이 탑승하곤 한다.


곤돌라는 베네치아의 좁은 운하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길고 날씬한 모양으로 발달했고, 한쪽으로만 노를 젓기 때문에 똑바로 가게 하기 위해 비대칭으로 생겼다. 또한, 곤돌라마다 모양과 크기, 내부 인테리어가 모두 다르다. 곤돌리에의 체중, 노를 젓는 습관 등에 따라 각각 다른 곤돌라가 제작되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보여도 모두 제각각 제작이 된 그야말로 수공품. 그러니 이 세상에 똑같은 곤돌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옛날 귀족들이 곤돌라를 경쟁적으로 사치스럽게 장식해 국가에서 이를 금지했기 때문에, 곤돌라의 외부 모습은 모두 검은색이지만, 내부 스타일과 장식은 곤돌리에의 취향에 따라 다르다.


곤돌라를 타고 베네치아 곳곳을 지났다. 유람선이나 수상버스를 탔을 때는 느낄 수 없는, 수면이 바로 옆에 있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우린 노래를 위한 별도의 요금을 지불하지 않았지만, 친절한 곤돌리에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사진도 많이 찍어줬다. 좁은 물길에서 곤돌라끼리 부딪치지 않기 위해 코너를 돌 때마다 곤돌리에가 우렁차게 “아~~위~~~” 하는 소리도 재미있고 인상적이었다.


곤돌리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그들을 육체노동자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베네치아의 엄친아다. 곤돌리에가 되기 위해서는 체력, 성악 등 몇 차에 걸친 시험에 통과해야 하고, 곤돌리에가 되면 한 척에 1,000만 원을 호가하는 곤돌라를 일단 돈을 빌려 만드는데, 이 돈은 성수기에 한 달 일하면 충분히 갚을 수 있다고 한다. 베네치아는 이제 따로 성수기라는 게 없을 정도로 인기 있는 여행지여서 웬만한 곤돌리에는 돈을 아주 잘 번다고 한다.


곤돌라 덕분에 기분은 계속 상승 모드. 불현듯 바닷물에 손을 넣으려다 멈칫했다. 베네치아의 바닷물은 깨끗하진 않다. 물을 배경으로 한 베네치아의 풍광과 비 내린 길 위의 반짝임은 매우 아름답지만, 그 물은 손을 넣어볼 만큼 깨끗하지는 않다. 낭만적인 분위기에 그윽하게 젖었다가 현실적인 물색에 냉큼 손을 거둬들였다.

곤돌라에서 내려 다시 길을 잃기 시작했다. 골목골목 거닐며 베네치아 먹방을 시작했다. 곤돌라 타러 가는 길에 봐두었던 초코타르트와 믹스 과일을 먹으며,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렸다. 작동을 중지한 분수대에 앉아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으로 엄청나게 크고 맛 좋은 피자를 먹었다. 그 분수대는 여행객들에게 좋은 식사장소로, 피자를 사 오기 전만 해도 빽빽하게 사람들이 있어서 못 앉았는데 피자 사 오고 나니 휑하니 자리가 났다. 상점 바로 옆 아까는 비어있던 정말 작은 계단 위에 한 가족이 자리를 잡고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귀여운 모습이 보였다.


배를 채우고 베네치아 본섬을 돌아보고 있자니, 작은 규모의 퍼레이드와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예쁘게 차려입고 행복한 표정으로 춤추는 사람들을 잠시 흥겹게 구경하고, 베네치아의 유명한 칵테일인 스프리츠(spritz)를 마시러 갔다. 2.5 유로밖에 안 하는 저렴한 술로 더위를 달랠 참이었는데, 달달하니 맛있긴 한데 혼합주여서 그런지 마시자마자 취기가 올라왔다. 살짝 헤롱헤롱. 그래도 낮술은 진리다. 생각해보니 베네치아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도 스프리츠를 마신 일이었다. 물의 도시에서의 첫날도 마지막 날도, 아니 매일 매일을 더욱 달콤하게 만들어준 게 이 칵테일이었다.

칵테일을 마시며 베네치아에서의 길 잃기를 이어갔다. 길 잃기에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곳, 길 잃기에 안성맞춤인 물길과 골목길을 거닐며 자꾸만 용감해진다. 술기운까지 있으니 두려울 게 없다. 세상 어느 길치, 방향치도 베네치아에서의 길 잃기는 두려움 아닌 행운으로 느낄 게 분명하다. 베네치아에서라면 발과 눈을 자유로이 둘 수 있다. 걸음이 어디로 향하건, 눈길이 어디서 멈추건, 보이고 대하는 건 아름다움일 터이니 말이다. 언제고 마주할 낯설고 익숙한 그 도시의 풍광을 그리며, 다시 그곳에서의 길 잃기를 기대해 본다. 베네치아에서라면 언제라도 기꺼이 길치가 되길 즐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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