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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i 고나희 Oct 05. 2017

사진 한 장이 이끈 곳

<<여행의 취향>> 중에서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물 위의 집과 다리,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 일렁이는 붉은 등. 사진 한 장이 상하이로 이끌었다. 상하이가 목적이 아니었다. 상하이 근교 수향마을, 주자자오(朱家角)에 가기 위한 여행이었다. 원래 중국에 관심이 깊지 않았다. 싫든 좋든 한자 문화권에 속한 나라에 살고 있으니, 중국은 가보지 않았어도 익숙한 곳이었다. 언제든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기도 했고, 다른 곳을 많이 다녀보고 난 후, 좀 더 나이 들면 가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곳이 중국이었다.


어느 날 한 장의 사진을 보았다. 물 위의 도시, 동양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는 곳이라는데 베네치아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느낌이 뚜렷하게 달랐다. 물의 마을이고 도시라는 점도 끌렸다. 나는 도시와 시골 중 도시를 선택하는 데 머뭇거리지 않는 취향을 가졌다. 물이 있고 도시가 있는 그곳에 가야 할 이유는 너무도 분명했다.


주자자오 사진을 본 그날 바로 항공과 숙소를 알아봤고, 한 달이 못 되어 상하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중국과 상하이가 설레어서가 아니었다. 난 그저 물의 도시에 어서 가야 했고, 얼른 보고 싶었다. 여행에서 조급함은 좋은 것이 아니거늘, 주자자오를 향한 조급한 마음만큼은 쉽사리 누를 수 없었다.


상하이 여행 둘째 날 주자자오로 향했다. 지하철 8호선 다스제(大世界) 역 3번 출구 근처 분홍색 버스를 기다리기가 얼마나 힘들던지. 후주고속노선(沪朱高速快线) 행 버스를 타면 1시간 채 안 걸려 주자자오에 도착할 수 있다. 역에 도착해 얼른 사람들이 나가는 방향으로 따라갔어야 했는데, 사진 찍느라 방향을 놓치고 말았다. 조금 헤매며 느릿하게 수향마을로 향했다. 늦춰진 길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소중해서 만남을 지연시키고 싶은 기분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서울 내 방 노트북에서 보았던 사진 한 장의 마법을 금방 풀고 싶지 않았다.


잠시 길을 헤매다 큰길 상점가를 찾아냈고 그 길을 따라가다 오른쪽 길목으로 접어들었던 거 같다. 먹거리 노점상이 무척 많았던 길목을 지나 점점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주자자오에는 물도 많고 골목도 많다고 했는데, 그걸 확인하며 기분이 자꾸자꾸 더 좋아졌다. 어려서부터 골목을 좋아해, 좁고 작은 길을 대하면 반갑고 기분이 좋다. 과자 파는 상점, 중국식 족발 파는 가게,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신구 상점 등이 이어지며 길이 조금씩 넓어지고 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기자기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목조가옥들로 이루어진 골목을 벗어나니 물 위의 서정적인 마을이 나타났다. 은은한 청자색을 띠는 강물과 그 강을 오가는 나무배, 강을 사이에 둔 양쪽 마을을 이어주고 있는 다리 등 서울에서 그리던 모습 그대로인 풍경에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묘한 서정적인 분위기까지 더해졌다.


‘동양의 베네치아’라는, 베네치아의 명성에 뭔가 끼워 맞춘 것 같은 수식어는 괜한 말이 아니었다. 주자자오의 나무배는 베네치아의 곤돌라(Gondola)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물의 도시, 물 위의 마을이 주는 감흥은 크고 깊을 수밖에 없다. 물이란 게 얼마나 크고 무서운 것인가.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진 것인가 말이다. 그런 물 위에 터전을 만들고 그 위에서 삶을 꾸려간다는 건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다. 물과 사람이 이루어내는 자연과 도시의 만남. 그것이 내가 물의 도시를 좋아하는 이유다.

베네치아의 화려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주자자오에 실망할지 모른다. 베네치아에서 얽히고설킨 물길과 골목, 그 안에 자리한 사람들이 빚어내는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던 사람이라면, 주자자오에서도 그런 모습을 다시 마주할 수 있다. 베네치아가 화려하고 석조 건물과 다리로 이루어진 곳이면, 주자자오는 좀 더 소탈하고 서민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곳으로 목조가옥, 목조 다리, 목조 배 등 나무로 이루어진 곳이다. 나무 질감이 주는 고유의 고혹적인 분위기와 자연적인 색감이 자아내는 그윽한 분위기는 정말 좋다.

한참을 다리 위에서 시간을 보내다 작은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골목을 거니는 중에도 주자자오의 물은 골목 사이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 깨끗하지는 않지만, 조금은 거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 골목이 내 눈에는 예쁘게 보였다. 주자자오의 골목이 예쁜 건 ‘이야기가 있는 공간’이라 그렇다. 골목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게 분명했다. 시간을 들여 알아내고 귀 기울이기에 충분한 가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을 거다. 사람과 자연이 조화로운 곳에 이야기가 없을 수 없다. 길지 않고 크지 않은, 좁은 골목과 작은 마을 어느 한 군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발걸음은 자꾸만 지체된다.

나무배는 자그마한 선착장에서 탈 수 있다. 선착장의 생김새와 규모가 베네치아 곤돌라 선착장과 비슷했다. 배는 위에 덮개만 달렸을 뿐 사방이 뚫려 있어 어느 자리에서고 밖의 풍경을 대할 수 있다. 사공 아저씨는 열심히 그러나 무심히 기계적으로 노를 젓고 있었다. 웃음기 가신 얼굴로 열심히 노만 젓는 사공은 곤돌리에의 친절한 태도와 유머러스한 표정과는 또 다른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곳 뱃사공에게 노를 젓는 일은 낭만보다는 생계에 가까워 보였다.


주자자오의 물은 짙고 어두운 녹색인데, 햇빛이 비치면 밝은 청자색을 띤다. 그 물빛의 색감이 신비롭다. 언뜻 뱃머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뱃머리에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을 수 있을 것만 같고 그럼 참 좋을 것 같은데, 배 안쪽에서 중심 잡기가 쉽지 않다. 아쉽지만 뱃머리에 가는 것은 포기하고 시선을 멀리 두어 방생교(放生桥)를 바라본다. 방생교는 주자자오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다. 이 다리 밑 동그란 아치 아래를 지나면 뱃놀이가 끝난다. 배에서 내리며 무표정한 사공에게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니 그제야 미소로 답한다.


배를 타기 전에 시간을 많이 썼는지 벌써 저녁이 너울너울 다가오고 있다. 분위기 좋은 목조가옥 찻집에도 가고 싶은데 상점들이 문을 일찍 닫는 게 아쉽기만 하다. 생각해 보니 여기 와서 물 한 모금 안 마셨다! 주자자오의 아름다움에 취해 허기를 잊고 있었다. 아직 문을 닫지 않은 노점상에서 소시지 몇 개를 사서 먹으며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자꾸만 자꾸만 뒤돌아서 물 위의 마을을 두 눈에 꾸욱 눌러 담으며. 내 방 노트북에서 보았던 곳을 두 발로 걷고 두 눈에 담다니, 저 멀리 손닿지 않는 곳에 있던 반짝임이 내 손 안에 쥐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특별한 여행을 나의 일상 안으로 끌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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