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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i 고나희 Oct 04. 2017

기찻길 마법

<<여행의 취향>> 중에서

기찻길에는 특별한 정서가 흐른다. 낭만을 넘어선 마법 같은 서정이 있다. 뭔가 좋은 일이 이루어질 것만 같은, 새로운 무언가를 만날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과 느낌이 함께한다. 기찻길이 있는 곳이라면, 그 외 별다른 게 없다 해도 그저 좋다. 철길을 향한 마음은 한국에서는 춘천, 정동진, 군산, 진해 여행으로 이어졌고, 바다 건너 다른 나라 여행으로 이끌기도 했다.

춘천 김유정 폐역사와 그 앞에 자리한 폐철로에서 불현듯 깃든 봄을 발견했던 건 깜짝 선물과 같았다. 80.7km, 1시간 반, 낭만의 길을 달려 도착한 김유정 문학관. 작가의 향토적 흔적과 북스테이션의 생경하고 멋진 모습은 기대했지만, 이런 마법 같은 서정을 대면할 줄은 미처 몰랐다. 봄을 찾아간 곳에 진짜 봄이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역으로 기능하지 않는 김유정 폐역사와 그 앞에 놓인 폐철로는 수명을 다했음에도 지쳐 보이지도, 초라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곳에는 봄이 내려와 있었고, 청춘과 젊음의 푸릇한 기운이 가득했으니까. 춘천의 봄, 청춘의 봄, 김유정의 봄이 그곳에 있었다.

알려진 이름만큼 볼 건 없고 사람만 많다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온 터라 정동진을 향한 발걸음에는 기대감이 전혀 없었다. 바다를 좋아해서 갔던 거지, 산이었다면 그런 소릴 듣고 갔을 리 없다. 물은 언제나 옳다. 물 중에 바다는 최고다! 정동진에 들어서는 길목에서 알았다. 실수했구나. 눈으로 보기 전에 판단하면 안 되는 것을 잊고 있었다. 큰 실수임이 분명했다. 바다 내음에 설풋 생경한 멋이 느껴졌다. 폐철로였다. 바다 앞에 남겨진 폐철로. 바다와 철길, 얼마나 낭만적인 조합이고 특별한 어울림이었는지. 정동진에 대해 오랜 시간 들어온 많은 이의 진부한 증언은 바닷바람에 날려 보냈음은 물론이다.


군산을 찾은 것도 기찻길 때문이었다. 근대의 역사와 아픔을 넘어선 설움이 깃든 그곳을 철길 덕분에 찾았다. 어디선가 경암동 철길마을을 봤는데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주민이 사는 곳을 조심스레 거닐며, 묘한 아름다움과 함께 아픔을 느꼈다. 군산에서 아픔을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이는 우리 역사에, 그 고장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게 분명하다. 마음은 복잡하고 불편해졌지만, 그 공간에 다행스러웠고 고마웠던 건 그곳이 살아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공간이었다면, 쇠락한 기운만이 가득한 곳이었다면 불편함도 복잡함도 미안함도 더 깊고 컸을 거다. 고맙게도 철길마을은 근대의 뚜렷하고 분명하고 지독했을 아픔을 딛고, 지금의 눈으로는 분명 예스러운 멋과 향을 지녀, 그곳을 찾는 이에게 즐거운 울림을 주는 곳으로 변모했다. 군산이 대견한 이유고, 그곳을 다시 찾을 이유였다.

봄날의 진해는 꿈이었다. 진해여행은 버킷리스트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경화역에 흩날리는 벚꽃 사이로 들어오는 벚꽃 열차의 모습은 퍽이나 달콤했다. 실상 진해 경화역은 전국 사진가들이 다투어 사진 전쟁을 벌이는 예쁘지 않은 모습이었고, 사진가들 아니라도 사람으로 덮여 지친 표정을 가진 곳이었다. 그럼에도 가고 싶었던 건 꿈결 같은 그 모습을 대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열차가 경화역에 들어서자 솜뭉치인 듯 눈 뭉치인 듯 보였던 벚꽃이 한 잎 한 잎 흩날렸다. 가득한 인파에도 출사 전쟁터의 모습에도, 분명 꿈을 대했다. 이면의 예쁘지 않은 모습은 잊힐 만한 달콤함이었다.

곡성 가는 열차는 전 좌석 매진이었다. 달콤한 연휴에 뒤늦은 기차예매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매 사이트를 새로고침하길 수십 번. 결국 가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입석을 예매했다. 무려 4시간을 서서 가야 했다. 곡성에 기차마을이 있다는데, 아니 갈 수 없다. 서서라도 가리라… 간이 좌석에라도 앉아, 식당 칸에서 꾸역꾸역 간식을 사 먹으며 눈치를 보면서라도 아니면 통로 바닥에 신문지라도 깔고 가겠어…. 각오를 칼같이 했지만, 기차마을로 향하는 마음이 큰 만큼 입석 4시간에 대한 부담도 컸다. 그런데 잠시라도 앉아 가자고 빈 좌석에 앉은 게 4시간을 내리 앉게 되었다. 나 혼자였으면 운이 좋다 싶었을 걸, 동행자의 좌석까지 공짜로 얻은 것에는 기찻길 마법이 이끌었다고밖에! 기찻길에 도착하기도 전에 마법이 시작됐다. 오랜 시간 기찻길을 향한 사랑이 그렇게 되돌아오고 되갚음 되었다고밖에!

결국은 바다를 건너고 말았다. 철길 하나 때문에 시작한 대만행이었다. 타이베이 근교 작은 마을 스펀(十分)에 간 건 처음부터 기찻길을 염두에 둔 여정이었다. 기찻길이 주는 낭만적 느낌은 힐링과 행운이라는 정서로 이완되고, 그곳에서 소원을 빌면 쉬이 그리고 아름답게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낳았다. 많은 이가 스펀 기찻길에서 하늘 높이 천등을 날리며 소원을 비는 것도 그런 까닭일 터였다.

작은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기찻길이 마을을 양쪽으로 가르고 철길 양옆으로 천등을 파는 작고 예쁜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상점 밖에서는 천등에 글씨를 적고 있는 여행객들이 이색적인 모습을 연출하며, 철길에는 하늘로 천등을 날리려는 사람이 가득했다.


천등을 날리려면 먼저 상점 안으로 들어가 안내판을 보고 천등을 고른다. 천등의 색에 따라 소원의 성격과 천등 가격이 달라진다. 천등의 색을 고르면 거치대에 천등을 걸어준다. 붓으로 천등에 소원을 적는데, 총 4면에 소원을 적는다. 천등에 소원을 다 적고 나면 상점 직원이 천등을 돌돌 말아 기찻길로 가져간다. 천등과 함께 사진을 찍어주는데, 재밌는 것은 총 4면을 모두 보이게끔 사진을 찍어주는 것이다. 한 직원이 사진을 찍어주고, 다른 직원은 각 면을 돌려주고 사진 찍을 땐 천등 뒤로 쏙 숨는다. 능숙한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천등을 날리면, 그건 너무도 빠르게 하늘 위로 사라져 버린다.


한순간으로 끝나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스펀을 찾고 천등을 날리는 것은 기찻길의 마법을 믿어서일 게 분명하다. 소원을 이뤄주는 기찻길 마법의 힘. 어느 곳에서나 이루어진다면 그건 마법이 아닐 거다.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남녀 주인공, 가진동과 진연희도 굳이 기찻길을 찾아 천등을 날리며 어리고 풋풋한 사랑이 이루어지길 빌었던 것처럼.

천등을 날리고 상점 안에서 갖가지 색과 크기의 천등을 구경하고 있으니, 밖에서 소란함이 느껴졌다. 상인들이 빠른 속도로 기찻길 위에 있는 천등과 상품들을 치운다. 순식간에 비워진 철길 위로 기차가 전속력을 다해 달려왔다. 그곳의 철길이 큰 의미를 갖고 천등 날리기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은 폐철로가 아닌 실제로 기차가 다니는 철길이라는 특별함 덕분인 것 같다. 아슬아슬한 스릴이나 위험을 무릅쓰고 소원을 빌었다는 특별함이 소원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불러오는 것만 같아서 아닐까.


기찻길을 향한 크고 끈질긴 마음은 스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기어코 징통까지 가도록 만들었다. 징통은 스펀과 멀지 않은, 핑시선의 종착역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다. 스펀에서 천등을 날리며 소원을 빈다면, 징통에서는 대나무 조각에 소원을 써 철길 옆에 매달아 놓는다. 징통에 가는 이들 역시 기찻길의 마법을 찾는 것이다. 영화 〈타이페이에 눈이 온다면〉의 주인공 메이가 잃어버린 목소리를 다시 찾고자 하는 것처럼, 이곳을 찾는 이 가운데 마음에 품은 소원 하나쯤 없는 사람이 없을 터였다.


징통의 또 다른 특별한 점은 용기만 있다면, 출발을 앞둔 기차가 있는 철길에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호기롭게 출발을 5분 정도 앞둔 기차 앞에 서서 소원을 빌어본다, 천등이나 대나무 조각 없이 그저 기찻길에 내 마음을, 소망을, 믿음을 기대본다. 평생토록 일상 같은 여행, 여행 같은 일상을 즐기며 이어갈 수 있기를. 일상과 여행의 마법 같은 시간이 풀리지 않기를. 언제나 그 시간을 즐길 수 있기를. 설사 늘 행복하고 즐겁지만은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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