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취향>> 중에서
나는 짧은 여행도 아주 좋아한다. 하루여행도 좋고, 주말을 이용한 1박 2일 정도의 쉼표여행도 좋다. 여행을 하다 보면 여행 자체가 지루해지는 순간이 생긴다. 편안하고 익숙한 게 좋고, 금방 적응한 나 자신이 기특하기도 있지만, 지루함이 밀려올 때에는 머물고 있는 여행지에서 또 다른 여행을 해본다. 근교로 짧은 소풍을 다녀오는 건 분명 몸과 마음을 환기시켜주는 힘이 있다.
바르셀로나의 여름이 바다를 찾게 했다. 7월의 유럽… 어디고 덥지 않겠느냐마는 그해 바르셀로나는 평년보다 무척 더워 나를 쩔쩔매게 했다. 물이라면 바다, 강, 시내, 풀장 등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물 중독자인 나는,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근처 어디에 바다가 있는지부터 알아봤다. 여행 중 하루는 물놀이를 하러 바다로 갈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바르셀로나에서 지하철로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큰 바다가 있었다. 바르셀로네타 역에 도착해 바르셀로네타 해변(Playa de la Barceloneta)으로 가는 길. 잘 놀려면 먼저 잘 먹어야 했다.
바다에 왔으니 해산물 요리로 배부터 채울 참이었다. 혼자였다면 그리고 스페인이 아니었다면 일단 접었을 푸짐한 식사였다. 다행히도 길에서 만난 일행이 많았고,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물가가 저렴한 스페인이었고, 스페인 음식은 짜고 매운 간이 세서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으니 입 짧고 돈 아쉬운 여행자에게 맞춤이었다. 바르셀로네타는 시우타데야 공원의 남쪽에 있는 해안 구역인데, 다양한 위락시설과 해산물 요리를 선보이는 레스토랑이 많아 괜찮은 식당 찾기가 쉬웠다. 주변을 둘러보다 손님이 유독 많은 집으로 들어가, 샹그리아(sangria)부터 주문했다. 식전 알코올 한 모금은 언제나 진리다. 기분이 급상승했다. 우리가 가장 먹고 싶던 싱싱한 새우, 스페인식 볶음밥 빠에야(Paella), 단체로 등장한 해산물 등을 와구와구 맛나게 해치웠다.
레스토랑에서 디너 같은 푸짐한 점심을 배부르게 먹고, 완전히 충전되어 다시 바다로 향했다. 샹그리아의 알코올 기운이 살짝 올라 더욱 들뜬 우린 말도 많아지고 발걸음도 빨라졌다. 해변에 도착하기 전에 항구가 보이는데 푸른 하늘, 푸른 바다 그리고 바다에 정박해 있는 새하얀 보트의 모습은 참으로 달콤했다. 항구를 지나 바르셀로네타 해변에 도착하고 보니, 이렇게 넓고 큰 바다가 도시 가까이 있을 수 있나 싶었다. 도시 근처에 지하철만 타면 뿅 갈 수 있는 바다가 자리하고 있다니, 부산의 해운대가 연상되었다.
도심 근처라 그런지 깔끔하고 깨끗하게 조성된 해변에, 주변에 레스토랑 등의 위락시설도 많고 화장실과 샤워시설까지 잘 갖춰져 있었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이어진 야자수와 길 따라 죽 놓인 긴 벤치는 누워서 바다와 하늘을 즐기기에 딱 좋았다. 하지만 그런 신선놀음은 나중에 할 일이었다. 일단 발에 모래도 묻히고, 시원한 물에 풍덩 하는 게 먼저였다. 워낙 무더위가 강했던 때라 모래사장은 일광욕 중인 사람으로 가득했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오전에 보케리아 시장(La Boqueria)에서 사온 과일을 먹으며, 모래사장의 따뜻함과 밝은 햇살을 즐겼다. 모래에 꼬물꼬물 발가락을 묻어 보고,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도 담고, 짐을 지키기 위해 두 사람씩 물놀이를 즐겼다.역시 여행은 옳다. 여행 안의 여행도 옳다. 그 여행이 물을 향한 것이라면 더욱.
니스에서 기분 나쁜 일을 겪었다. 한국에 두고 온 것들, 두고 온 일 중 잘못된 게 있었다. 내 실수가 아닌 다른 이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로, 30분이나 휴대폰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맥이 탁 풀렸다. 여행하는데 이런 미적지근하고 찜찜한 일을 겪어야 한다니. 숙소에 누워 쉬고만 싶어졌다. 정작 바라는 건 그게 아닌데, 상한 기분을 피하려 손쉬운 방법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원래는 좋은 계획이 있던 날이었다. 그날 나는 하루만에 모나코를 다녀올 계획이었다. 일찍 일어나 아침식사를 든든히 하고, 일찌감치 모나코에 갈 생각이었는데… 너무 많이 늦어 버렸다. 많은 계획과 일정이 틀어져 버렸다. 이미 하루를, 여행을 통째로 망친 기분이었다. 그냥 쉴까. 지치고 피곤한 몸과 맘이 쉬운 유혹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단 20분 거리였다. 니스에서 모나코까지는 기차로 겨우 20분이면 갈 수 있었다. 운행간격도 짧았다. 늦었지만, 만회가 가능한 시간과 거리였다. 그래, 가자. 이대로 누워버린다고 해결될 건 아무것도 없잖아. 나중에 짜증만 더 날 거야. 무엇보다 기분에 무너져 버리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가자. 가. 지금 당장 일어나!
길을 나선 지 5분도 안 되어 기분이 나아졌다. 아니 좋아졌다. 니스의 햇살은 얼마나 포근한지. 한여름이라 무척 더웠지만, 따뜻하고 포근하고 밝은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여유가 생겼다. 숙소에서 트램을 타면 니스 역까지 1,2분이면 될 거리였다. 걸어서 30분이 걸렸지만 괜찮았다. 이미 늦은 거 몇십 분 더 늦는데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프랑스 지중해 연안의 휴양도시 니스에서 동쪽으로 약 30km 거리에 자리한 입헌군주제 국가 모나코 공국. 니스에 들른 건 모나코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모나코 여행을 포기하려고 했다니. 아니 될 일이다. 몬테카를로 역 밖으로 나오니 높은 지대임이 실감났다. 모나코와 니스는 해안가 도시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세부 모습은 상당히 달랐다. 바다를 끼고 있는 휴양도시란 것 외에 니스와 모나코의 인상에서 공통점을 찾기 쉽지 않았다.
면적 1.49 제곱킬로미터,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 모나코는 웬만한 우리나라 도시 하나보다도 작다. 작지만 부유한 이 나라 국민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 한다. 세금은 카지노 수입에서 충당할 수 있다고. 언어는 프랑스어, 화폐는 유로화를 사용하는 등 프랑스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어, 독립국이라기보다는 프랑스의 한 도시인 것 같지만 엄연한 공국이다.
작고 부유하고 화려한 도시 같은 국가, 매력적이고 낭만적인 정서가 느껴지는 모나코는 할리우드 스타 그레이스 켈리의 현대판 신데렐라 스토리까지 더해져 동화속 나라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단정하고 고급스럽고 화려한 모습에 압도됐다. 항구를 빼곡히 채운 푸른 바다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하얀 고급 유람선들에 감탄했다. 모나코에 온 이유 역시 현실 속 동화를 몸소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여행에는 때로 비현실적인 경험도 필요하다. 모나코의 다섯 지구 중,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 왕궁이 있는 모나코 지구 즉 모나코빌(Monaco-Ville)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모나코빌 맞은편 광장에는 레스토랑, 기념품 상점, 과일 상점 등이 들어서 있다. 광장 한켠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고, 여유롭게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들 뒤로는 놀이기구를 타는 아이들이 보였다. 행복하고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모나코에서 그 유명한 샬롯 카시라기 공주는 못 보았다. 공주는 아마 여름이라 휴가지에서 휴양 중이었을 테지. 아니었다고 해도 내가 그녀를 만날 일은 없었을 거다. 그럼에도 모나코 왕실 사람들은 많은 여행자를 모나코로 부르는 현대판, 현실판 동화의 주인공이다. 광장에서 물과 과일을 사며, 쇼윈도 어디에나 붙어있는 샬롯 공주의 사진만 겨우 보고 모나코빌로 걸음했다.
모나코빌에 있는 모나코 대공궁(Palais Princier de Monaco)은 1215년 제노바인이 세운 요새를 16세기에 궁전으로 개축한 것으로, 다른 나라 다른 지역의 왕궁에 비해 외관이 수수하다. 요새로 지어진 만큼 언덕 위에 있는 덕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야 했지만, 궁 앞의 전망대에서 조망하는 항구의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그 보상이 된다.
모나코빌에 오르기 전부터 모나코 이곳저곳에 왕족과 왕실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모나코빌에 가니 그런 특징이 한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모나코 왕실이 얼마나 잘 상품화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던 게, 어떤 기념품 상점에 들어가나 왕실과 관련된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쇼윈도의 기념품은 왕실 그 자체였다. 모나코의 국왕 알베르 2세와 왕비인 샤를린 위트스톡, 모나코의 왕비였던 그레이스 켈리, 그녀의 아들과 딸, 손녀 손자들의 어린 시절 모습 등. 모나코는 왕실을 철저히 관광상품화하고 있었다.
왕궁 앞 광장에서는 근위대 교대식도 진행되는데, 왕궁이 소박한 만큼이나 교대식에도 큰 볼거리는 없었다. 왕궁을 지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건물 대부분이 밝은 노란색을 띠고 있었고 때 묻지 않은 깨끗한 모습이라 햇살 속에 빛나는 모습이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그런 건물 중 가장 아름다웠던 게 모나코 대성당(Cathedrale de Monaco)이었다. 이 성당은 헐리우드 배우 그레이스 켈리와 모나코 왕자 레니에 3세의 결혼식이 있었던 장소로도 유명하고, 그녀와 레니에 3세가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본당의 모습이 인상적인데, 성당의 지하 왕실 묘역에는 그레이스 켈리 부부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
레니에 3세는 2005년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23년 전 교통사고로 죽은 왕비 그레이스 켈리를 잃은 후 재혼도 하지 않고 평생 그녀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사실 모나코 대성당은 아름답긴 하지만, 유럽의 다른 많은 화려하고 웅장한 성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담하고 소박해 볼거리가 많지 않다. 그러나 화려함이나 웅장함 없이도 특유의 기품 있는 분위기와 낭만적인 정서를 지닌 곳인데, 그건 그레이스 켈리의 현대판 신데렐라 스토리와 러브스토리가 주는 인상 덕분인지도 모른다.
깨끗하고 밝은 골목을 거닐며 화사한 건물과 풍경을 대하는 게 좋긴 한데, 재미는 좀 적은 것 같다. 깔끔하고 화사하고 안정된 모습이 여실한 탓이었다. 슬슬 동화에 지쳤던 것일까. 세상에 흔한 것이 아닌 왕실, 신데렐라 스토리, 국왕의 사랑 등은 분명 인상적이고 흥미를 끄는 상품성이 뚜렷한 동화이지만, 세상이 늘 동화 같지 않기에 그런 비현실성은 현실을 사는 이에게 때로 피로가 될 수도 있다.
다행히 모나코빌의 골목을 누비다 익숙한 모습을 대하며 동화의 피로를 풀게 됐다. 쇼윈도 앞에 그리운 추억을 상기시키는 그림이 진열되어 있었다. 여자 어른과 두 아이의 모습이 담겨 있는 그림은 날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계실 그리운 엄마와 어릴 적 바닷가에서 함께했던 추억을 환기시켜 주었다. 못 박힌 듯 꽤 오래 그림 앞을 떠나지 못했다. 즐거이 동화 속을 유영하다, 그 동화가 지쳤을 즈음 만난 익숙한 현실까지, 모나코 하루여행은 즐거운 소풍 같았다. 아침에 상한 기분과 나쁜 감정으로 몸마저 안 좋아지는 걸 느꼈는데, 기분도 몸도 말끔히 좋아졌다. 하루여행은 만병통치약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