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ri 고나희 Oct 03. 2017

일상 같은 여행, 여행 같은 일상

<<여행의 취향>> 중에서


일상 같은 여행을 하며, 여행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것. 여행과 삶에 대한 나의 철학이자 인생 목표다. 여행과 일상이 다른 것이 아니고 결국 삶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같다고 생각하기에 여행을 바라보는 시각도 일상을 대하는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여행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나 일탈로 규정되기도 하고, 일상과는 별개의 세상으로 떠나는 것으로 인식되곤 한다. 여행지에는 일상에서 결여된 특별하고 새로운 보석 같은 것들이 숨어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도 한다. 나는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여행도 즐기지만 내가 여행을 하면 할수록 분명해지는 생각은 여행이 일상처럼 느껴지고, 일상이 여행이라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여행을 하며 일상생활에서와 같은 편안함과 익숙함을 느낀다. 파리 숙소 부엌에서 서툰 솜씨로 저녁식사를 준비하거나, 베네치아의 골목골목을 서울 우리집 동네를 돌아다니듯 거닐 때, 하루에도 격차가 큰 런던 날씨에 당황하지 않고 살포시 내리는 비쯤은 그냥저냥 맞고 다니며, 서울 포장마차에서 새빨간 떡볶이를 콕콕 찍어 먹듯 호치민 노점상에 털썩 주저앉아 쌀국수 면발을 후루룩 먹고 나서 주인아줌마가 권하는 그다지 깨끗해 보이지 않는 요거트를 디저트 삼아 푹푹 떠먹을 때 여행은 낯설고 물선 것이 아닌 그저 일상이 되어준다.


그런 한편, 일상에서도 두근거림과 낯선 설렘, 특별함을 느끼게 되었다. 늘 여행이 고픈 일상여행자이고, 언제나 새로움과 신선함을 마주하고 싶어 하지만, 늘 떠나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게 주어진 일이 있고, 져야 할 책임과 의미도 있으며, 앞으로의 여행을 준비하거나 지난 여행을 뒤돌아볼 시간을 갖기 위해서라도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일상여행이 시작되었다. 떠나고 싶은데 떠날 수 없을 때, 그런데도 당장 신선한 공기와 자극이 필요할 때, 나는 일상 안에서 여행한다. 먼 거리로 오랜 시간 떠나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다. 주어진 시간과 여건 안에서 나만의 여행을 즐기며 ‘여행해갈’을 풀어내곤 한다.


일상여행은 소소하고 다양할 수 있다. 여행지에서 끄적거린 노트와 여행지를 담은 사진을 보며 즐거운 추억을 상기하는 건 아주 쉬운 일상여행이다. 여행 사진들을 앨범에 정리하는 데서 나아가, 인터넷 포토북 사이트를 이용해 나만의 여행포토북을 재미있고 손쉽게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즐거운 여행지의 기억을 담은 포토북을 만들어서 소장하거나 소중한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할 수도 있다. 언제부턴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포토북을 만들어 외할머니께 드리곤 한다. 연세가 90이 넘은 외할머니께선 여행하시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어려운데, 손녀딸이 여행 후에 포토북을 만들어 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다. 사진을 통해 가보시고 싶은데 못 가시는 여행지 구경도 하시고, 손녀딸이 재미있게 여행하는 모습을 보시면 대견스러워하고 즐거워하신다. 내가 만든 포토북이 할머니께는 손녀와의 소통 창구이자 당신이 여행하는 방법인 거다.


여행지에서 끄적거린 메모나 글, 여행 중 썼던 일기에 기억을 되새겨가며 살을 붙여 노트나 블로그 같은 나만의 기록 공간에 옮겨 여행기를 써 보는 것도 즐거운 일상여행이다. 이게 내가 가장 즐기는 일상여행이기도 한데, 여행 기록을 통해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하는 거다. 나 홀로 했던 첫 여행인, 유럽여행 이후 블로그에 여행의 감상과 기록을 꾸준히 적어 갔다. 여행기를 쓰는 동안에는 마치 여행이 끝나지 않은 것만 같아 아쉬운 여행의 끝을 지연시킬 수 있었고, 여행이 끝난 데 대한 아쉬움과 우울함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어서 독하디독한 여행 후유증을 이겨낼 수 있다.


일상여행의 또 다른 방법으로 앞으로 떠날 여행을 생각하며 가 볼 여행지를 정하고, 여행계획을 구상해 볼 수도 있다. 시간 날 때마다 여행을 즐기고, 부족한 시간과 돈을 어떻게든 만들어 여행하는 나이지만, 여전히 세상은 넓고 가볼 곳은 수도 없이 많다. 여러 여건으로 다음으로 미뤄둔 여행지, 전에는 미처 몰랐던 새롭게 알게 된 여행지, 지금 모르지만 언젠가 알게 되고 가고 싶어질 미지의 여행지 덕분에 미래의 여행은 무수히 많은 경로와 방향을 갖는다. 이런 경로와 방향을 모아 하나씩 정리하다 어느새 그 여행계획이 실현되는 멋진 경험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당장 실현되지 않아도 좋다. 여행계획을 정리하고 구상하는 자체가 즐거움이고, 그러는 사이 다음 여행의 실현 가능성은 점점 커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즐겁게 여행했던 여행지의 특색을 살린 이국적이고 이색적인 컨셉의 카페나 가게를 찾는 것으로도 여행해갈을 꽤 풀어낼 수 있다. 그리스, 베트남, 프랑스, 스페인, 인도, 태국 등 다양한 나라의 음식과 분위기로 꾸며진 카페나 식당이 꽤 있다. 다녀온 여행지 컨셉의 음식과 분위기는 그곳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앞으로 가볼 여행지 컨셉의 분위기는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주곤 한다. 꼭 여행지 컨셉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여유로운 날, 익숙한 동네나 장소가 아닌 낯선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 본다. 나를 아는 이 하나 없고, 신선하고 참신한, 기분 좋은 느낌이 가득한 공간에서 좋아하는 커피를 들며 그저 그런 낯섦 속에서 나는 일상여행자가 된다.

하루여행도 좋다. 하루나 반나절은 크게 부담이 없으면서도 여행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다. 나는 서울과 서울 근교로 곧잘 하루여행을 한다. 서울은 도시이지만 여러 왕조의 수도 역할을 거듭했던 곳이라 내가 좋아하는 유적지도 많고,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등 고궁도 많이 자리하고 있다. 북촌이나 서촌에는 지금 보면 오히려 이색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예스러운 한옥 정취가 가득하다. 주요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역사・문화여행을 떠나 볼 수도 있다. 밝은 낮에 이런 곳을 거닐다 어느덧 땅거미가 질 때쯤 나오면 흡사 시간 여행을 한 것만 같은 기분을 맛볼 수 있다.

서울 근교로 눈을 돌리면 여행지의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내가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한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중국, 대만, 홍콩 등 비슷한 듯 다른 중화권의 문화가 혼재되어 있다. 중국풍 목조가옥과 대만 먹거리인 펑리수와 밀크티, 거대한 페루와 곳곳을 물들인 붉은 색감은 나를 당장 대만과 중국으로 떠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다. 강촌과 춘천도 하루여행으로 가볼 만하다. 학기 말이면 학생들이, 휴가철이면 여행객들이 앞다투어 이곳을 찾는 이유가 있다. 이른 아침 출발하기만 한다면 군산이나 강원도 대관령 양떼목장까지도 하루여행으로 다녀올 수 있다. 나야 서울에 살고 있으니 서울과 그 근교로 하루여행을 떠나는 것이지만,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 지역과 그 근방을 하루여행할 수 있다. 아무래도 서울보다 문화여행을 하기엔 부족함이 있을 수 있지만, 인접한 지역으로 더욱 다양한 경로의 지역여행을 할 수 있는 게 지역 거주 여행자가 가진 장점이자, 서울 거주 여행자가 부러워하는 점이다.

가본 적 없다고 해서 여행지가 낯설고 물선 것만은 아니다. 굳이 먼 곳으로 오랫동안 떠나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여건 안에서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즐기다 오는 것이 여행이다. 누구라도 일상생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평범한 듯 보였던 일상을 이색적으로 즐길 수 있고, 여행지에서 낯선 이방인이 되어 뭔가 겉도는 듯한 이질감 외에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낄 수 있다. 어느새 일상여행과 여행일상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여행과 일상이 교차된 공간에서 일상여행자로 살아갈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필수 vs. 필수는 아니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