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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i 고나희 Oct 07. 2017

길과 성곽

<<여행의 취향>> 중에서

산 중턱 절벽에 위치한 교토를 대표하는 사찰, 기요미즈데라(淸水寺). 교토를 여행하는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그러나 정작 내게 매력적인 건 사찰보다 길이었다. 기요미즈데라에 갈 때는 자완자카라는 오르막길로 가고, 내려갈 때는 기요미즈카자를 거쳐 산넨자카와 니넨자카를 지난다. 기요미즈데라를 오가는 많은 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 ‘자완자카’는 그 자체가 흥미로운 여행지인 예쁜 길이다.

자완자카 양쪽으로 상점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보통의 관광지 상점들과 조금 다르다. 교토에서만 볼 수 있는 전통방식으로 만든 인형과 천, 지갑, 도시락 등 품을 꽤 들이지만 그만큼 개성 있고 독특한 공예품과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다. 여타의 관광지에 비해 화사함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호젓하고 수더분한 매력이 있다. 숨은 전통 상품들을 보물찾기하듯 찾아내는 재미도 있고, 그 덕분에 화려하고 규모가 큰 시조나 기온 거리보다 오히려 더 재미있고 마음에 들었다.


자완자카에 간 건 교토 출장 때가 처음이었고, 두 번째는 오래된 친구와 오사카&교토 여행을 했을 때였다. 함께 여행한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길을 거미줄 같다고 했다. 한 상점에 들어갔다 나와 길을 계속 가게 되는 게 아니라, 바로 다음 상점이나 맞은편 상점으로 들락날락하게 되는 게 마치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벗어날 수 없다는 거였다. 그만큼 그 길은 매력적이었다.


자완자카 언덕길을 다 오르면 바로 기요미즈데라로 연결되고, 기요미즈데라 앞으로는 기요미즈자카가 이어진다. 작고 예쁜 길에서 기분 좋은 감흥을 얻은 터라, 이어지는 기요미즈자카에도 기대를 좀 했다. 이 길은 자완자카보다 훨씬 많은 상점을 품고 있었지만, 상점 앞 진열대에는 번지르르하고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기념품 따위가 놓여 있었다. 게다가 관광객들로 넘쳐 나고 있어 피로감을 주었다.


어려서 나고 자란 서울의 강북에는 동네마다 골목이 많았다. 내가 살던 동네도 그랬다. 동네 작은 골목에서 친구들과 뛰어다니며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고 경험했다. 친한 친구들과 소꿉장난하던 곳, 장난기 많은 부모님과 숨바꼭질하던 곳, 잠옷 바람으로 배드민턴을 하던 곳은 모두 집 앞이나 우연히 발견한 이름 모를 정겨운 골목이었다. 이 골목 안에는 누가 있을까, 저 골목에서는 무얼 보게 될까. 즐거운 호기심과 예기치 못한 발견이 기분 좋은 유년의 추억을 만들었다.


그러나 자라면서 그 정겹던 골목들이 하나둘 없어지는 걸 경험했다. 골목이란 게 낭만과 이야기를 가진 공간이긴 했지만, 효율적이라 보기는 어려운 것이니 없어지는 게 당연한지도 몰랐다. 그런 당연한 변화에 뒤처지는 감정이 게으른 건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골목의 경험을 바다 건너 이국에서 대면할 줄이야. 별 매력 없이 시끄러운 기요미즈자카를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난 계단으로 들어섰다. 산넨자카다. 계단식으로 시작되는 길이라 조심하라는 뜻인지, 여기서 넘어지면 3년 안에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기요미즈자카 옆길인데 기요미즈자카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자완자카보다는 붐볐지만, 좁고 작은 길 양쪽으로 예쁘장하고 개성이 강한 상점들이 자리하고 있다.


예쁜 경단 모양인데 촉감은 마치 푸딩같이 부들부들한 비누를 벽면과 천장에 가득 걸어둔 비누 상점, 달콤한 향 가득한 나가사키 카스테라 상점, 투명 창을 통해 공예 과정을 밖에서 볼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던 이색적인 도자기 상점, 진열된 전통 의상과 양산이 눈길을 끌던 의복 상점, 보자기도 예술품이 될 수 있는 걸 보여주는 보자기 공예 상점 등 가게마다 다른 분위기와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시로 다니는 인력거와 인력거꾼들, 자신들이 많은 여행객이 찍는 사진의 피사체가 된 줄도 모르고 상점 구경하기에 바쁜 기모노 입은 소녀들도 그 길에 재미를 더했다. 넘어지건 말건 이곳저곳 들락거리며 구경하기에 바빴다.

산넨자카를 내려오다 오른쪽으로 꺾인 길이 니넨자카이다. 오래되어 보이는 목조가옥 사이에 난 이 예쁜 길에도 넘어지면 2년 안에 죽는다는 무서운 이야기가 있으니, 산넨자카와 니넨자카를 걷다간 어디 제 명에 살 수 있겠나 싶지만, 매력적인 풍광을 보는 재미에 발걸음을 더욱 재게 놀리게 된다. 산넨자카가 예쁜 상점으로 가득한 곳이라면, 니넨자카는 목조지붕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니넨자카에 갈 때면 늘 해가 저물곤 했다. 자완자카부터 기요미즈데라를 거쳐 기요미즈자카, 산넨자카 등 볼거리 많은 길을 두루 지나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지는 해의 노을 아래에서는 니넨자카에 자리한 많은 목조가옥의 지붕이 도드라져 보였다.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평평한 목조지붕은 그 길의 가장 큰 장점이자 아름다움이었다.


이렇게 교토, 이국 도시의 골목이 뜻밖에도 정겨운 느낌을 불러냈다. 자완자카와 같은 소박하고 작은 길, 산넨자카와 니넨자카 같은 계단식 골목이 자아내는 정겨운 느낌은 어릴 적부터 골목과 유독 친했던 유년의 추억을 불러냈다. 이국에서 대하는 풍경이 생경하지만은 않고, 익숙하고 낯이 익는다는 건 은근히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일상을 떠나 여행했지만, 다시금 일상을 마주하게 된 것이니까. 일상과 여행이 결국은 같은 결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확인한 것이어서 그랬고, 잊고 있던 유년의 기억을 소환해낸 것이 반가워서였다.

유년과 관련해 내게 의미 있는 공간은 골목 말고도 성곽이 있다. 호엔잘츠부르크 성에 가는 케이블카를 탄 건 원래 타려던 시각보다 30분이 지나서였다. 케이블카 안내원의 “30분 뒤면 할인 티켓을 살 수 있는데, 성곽과 성 외부만 보는 티켓이지만, 이 시간에 성을 자세히 둘러보기 어려우니 그 티켓을 사는 게 나을 것”이라는 말에, 30분 동안 성벽 밑에 있는 성 페터 성당에서 시간을 보내고 올라가는 길이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자마자 거대한 성곽이 바로 앞에 이어졌다.

호엔잘츠부르크 성은 성이라기보다는 성곽이나 성벽이라 하는 게 어울리는 곳이다. 워낙 방어용으로 만든 성채라 미적인 매력보다는 군사적 기능에 치중한 곳이다. 잘츠부르크는 지대가 높은 도시가 아닌데, 성은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대인 해발 543m에 자리하고 있어, 잘츠부르크 어디에서고 성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성 자체가 무척 아름답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어디에서나 탁 트인 전망을 만날 수 있고 성곽과 푸른 하늘이 함께하는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멀리 잘자흐 강과 잘츠부르크 구시가와 신시가를 한눈에 담을 수 있기도 하다.


성곽이란 어디든 비슷해 보여서인지, 사람 없는 성곽에 서 있으려니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유년을 보낸 성북동에는 동네를 따라 성곽이 있었다. 호엔잘츠부르크 성에 비하면 훨씬 작은 규모였지만, 어린 나와 친구들이 성곽 주변에 모여 장난치고 놀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어릴 적 기억일수록 아름답게 포장되기 쉬워서 성벽에서 놀던 시절은 마냥 행복하게 기억된다. 친구들과 뛰놀던 성곽, 성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어린 마음에 자주 감탄을 했었는데, 마음을 울리는 풍경을 보며 섬세하게 감상을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어린 눈에도 도시와 도시를 둘러싼 생경한 성곽의 전망은 인상적이었다.


성곽이 싸고 있는 동네 언덕과 골목은 놀이터였다. 따로 놀이터가 필요 없었다. 길과 공터가 놀이터였고, 길에 있는 것들이 놀잇감이었다. 어릴 적 흙놀이와 소꿉장난을 하다 보면, 알던 친구도 모르던 아이들도 그냥저냥 섞여 놀았고, 집 안에 있다가도 친구의 “노올자!” 길게 끄는 소리 한마디에 밖으로 뛰어나가곤 했다. 잘 꾸며진 공원이나 놀이터가 아니었어도, 유년을 보낸 동네 길과 언덕, 성벽에 애정을 갖고 있다. 어떤 이들은 공원이나 휴식 공간이 부족한 한국의 도시 환경에 단점을 토로하는데, 그 의견에 어느 정도 공감하면서도 생각을 달리하게 된 계기가 있다.


대학원 동료 B는 프랑스 파리에서 나고 자란 프랑스인 친구다. 수업이나 세미나를 마치고 그와 함께 학교 근처 호젓한 연남동 골목을 거닐곤 했다. 그는 “어린 시절 내가 이런 골목에서 자랐다면 좋았을 텐데······.” 라고 했다. 공원이 많은 파리에서 자란 사람이 이런 좁은 골목에서 유년을 못 보낸 걸 아쉬워하는 게 의외였다. 그는 공원보다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고 앞집, 옆집에서 아이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나와 함께 골목에서 노는 모습이 무척 부럽다고 했다.


내게는 익숙한 일상의 공간이, 다른 곳에서 온 사람에게는 인상적이고 부러운 것일 수 있다. 공간과 쉼터, 놀이터에 대한 느낌은 생각보다 주관적인 것이라는 걸 느낀 순간이었다. 유럽이나 영미권의 공원을 대하는 마음도 조금 달라졌다. 내 주변에 흔하지 않기에 특별하고 좋은 공간이라고 여겨졌던 것이지, 그런 공원이나 쉼터가 반드시 휴식을 취하는 일상의 공간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년의 언덕과 골목, 성벽은 어느 곳보다 멋진 놀이터였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내가 특별한 공간을 소유하고 누렸었구나…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따뜻한 잘츠부르크 저녁 햇살을 쬐며 한동안 포근한 유년시절 추억과 공간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어릴 적 살던 곳에서 너무도 멀고 멀리 떨어진 오스트리아 소도시가 소중한 기억과 겹쳤다. 이후 잘츠부르크를 떠올릴 때면 아마도 포근한 느낌이 들 것이라 예감했다. 그 순간 역시 유년의 기억처럼 또 다른 기억과 추억이 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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