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취향>> 중에서
깜깜한 밤, 그 애가 내 침대 안으로 들어왔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서운 꿈을 꿨다고 하는데 아마 낮에 갔던 놀이공원 유령의 집 때문이었을 거다.
겁 많은 나의 놀라움을 무거운 눈꺼풀이 눌렀다. 그렇게 16살의 나와 14살의 그 아이는 좁은 침대를 함께 채우며 남은 밤을 보냈다.
나의 첫 해외여행지는 미국이었다. 캘리포니아 주의 오래된 도시 새크라멘토에서 단기 어학연수가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만 16살. 또래가 많았던 덕분에 금방 친해지긴 했지만, 친구는 친구일 뿐 가족은 아니었다.
은근히 불편했고 살짝 겁도 났다. 걱정이 있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면 아프곤 하는 배가 자주 심하게 아팠고, 잘 먹지 못한 탓에 체중이 6kg이나 빠졌다. 한 달 만에 말이다.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일행 중 한 명이던 그 아이와 친해졌고, 우리는 같은 홈스테이에 배정됐다. 그때는 그 애가 무척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둘다 어리기는 매한가지였다.
햇살 잘 들던 방에 나란히 놓인 두 침대에서 각자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 애는 어둠 속에서 내 침대로 자주 기어들곤 했다.
겁 많던 그 애와 나를 돌이켜보면 헛웃음이 난다. 뭐가 그리 무서워서 크지도 않은 방 가까이 붙어 있는 침대를 서로 오갔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무서워했던 건 어둠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와 그 애가 느낀 불안감은 어린 나이에 가족을 떠나온 여행에서 야기된 것일 터였다.
가족여행이나 학교캠프 외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먼 나라, 먼 시간의 여행이라는 두려움은 어두운 밤 낯선 침대에서 더욱 커졌을 것이다.
그때보다 몸도 마음도 커져 다른 나라 여행을 즐기고 있는 지금, 내가 가장 선호하는 여행 동행자는 나 자신이다.
홀로 하는 여행을 정말 좋아하게 된 나는 16살의 나와 많은 부분에서 달라졌다. 지나온 시간만큼 여행경험치가 쌓여감에 따라 두려움도 무서움도 점점 사라져갔다.
난 겁이 많다. 그러나 가족 없이 다녀온 첫 미국여행 이후 여행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나홀로 해외여행을 떠나기로 한 전날이었다. 짐을 싸고 풀고 다시 싸기를 여러 번, 이미 많은 짐을 빼냈던 캐리어인데 그 무게가 여전히 부담스러워 그만 패닉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하얗게 질려 안절부절 쩔쩔매는 나를 보며 엄마는 “그냥 가지마. 아휴, 진짜 널 어떻게 혼자 가게 할 생각을 했는지. 안 되겠어, 못 보내겠다”고 하셨다.
딸이 혼자 여행을 간다는데, 그것도 먼 다른 나라로 간다는데 두 분이 걱정하시는 건 당연했다.
내가 더 태연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있는 걱정 없는 걱정 다 시키고, 의젓한 것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나는 출국했다.
딸을 배웅하고 염려 가득한 맘으로 혼자 돌아갈 엄마보다 나는 나 자신이 더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살짝 겁에 질려 있는 나를 진정시켜 출국장으로 들이민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내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여행은 ‘일상 같은 여행’이었다. ‘가장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여행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나홀로 여행’이라는 나의 철학이 겁 많은 내 등을 떠밀어주었다.
차곡차곡 쌓인 여행의 경험만큼 여행의 일상이 한결, 아니 더없이 편해졌다. 새로움과 낯섦이 두렵지 않은 지금의 나는 가끔 겁 많았던 예전의 나를 뒤돌아본다.
낯설고 미숙했기에 더욱 특별했던 경험이 나홀로 여행을 즐기는 일상여행자의 길을 열어줬다는 고마움에 가끔 기억 저 멀리에 있는 나를 불러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