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를 갖는 공간

<<여행의 취향>> 중에서

by sari 고나희

파리라 다행이었다. 홀로 떠난 첫 여행에서 나는 파리를 찾았다. 파리와의 첫 만남은 그보다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오로지 파리에만 머물렀던 그 여행. 유럽이 목적이 아닌 파리가 목적인 여행이었다. ‘한 달간 한 도시’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여행한 첫 도시가 바로 파리였다.


그래서 특별했다. 파리는 내게 분명한 이유를 갖는 공간이었다. 프랑스 역사, 특히 대혁명 전후시기에 관심을 갖고 있던 사학도에게 파리는 반드시 가야 하는 도시였고, 확인할 것이 많은 공간이었다. 책 속의 프랑스사는 인상적이었지만 너무나 멀었고, 매력적이고 흥미로웠지만 생동감이 없었다. 두 눈으로 보고 느끼며 확인할 가시적인 것이 필요했다.

처음 만난 파리는 엄마와 함께였다.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엄마와 역사를 전공하고 프랑스사에 관심이 많던 난 표면적으로는 완벽한 파리여행 동반자였다.


전공과 취향이 잘 맞고,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친구이자 가족인 우리였으니까. 우리의 눈과 머리, 마음은 파리에 정확히 꽂혀 있었다. 다른 곳을 논의하거나 생각해볼 필요가 없는 두 여행자에게는 여행에서 서로 맞춰가고 포기할 것이 적을 거라고,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 여행이 될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난 프랑스어 다 잊어버렸고 대신 말해줄 생각 없으니,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

엄마는 비협조적이었다. 엄마가 특유의 비음이 섞인 부드러운 프랑스어를 우아하게 구사했던 건 헤매던 길을 찾거나 기차표를 사거나 음식을 주문할 때가 아닌, 파리행 비행기 안에서 엄마보다 열 살은 어려보이는 승객이 엄마에게 호감을 보였을 때와 튈르리 공원 꽃밭에서 점잖은 신사가 데이트 신청을 했을 때였다.


서울에서 파리까지, 다시 파리에서 서울까지, 분명 둘이 하는 여행의 일정을 나 혼자 준비해야 했다. 차라리 혼자 올 걸…. 패키지여행을 극도로 싫어하는 우리는 한 번도 패키지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다. 덕분에 엄마를 위한 1인 맞춤 가이드와 통역이 되었던 나는 아마 그때 이후 나홀로 여행을 바라게 된 것은 아닌지.


파리에서의 첫 여정은 자콥 거리(Rue Jacob)였을 거다. 독특하고 이색적인 상점과 갤러리가 많은 자콥 거리는 일요일이라 문 닫은 곳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문을 연 곳이 있으면 들어가고, 문을 닫은 곳은 쇼윈도를 통해 즐겼다.


그리고는 부드럽고 따뜻한 냄새를 가득 풍기는 빵집에서 딱딱한 방망이가 되기 전의 길고 말랑말랑한 바게트를 샀다. 그걸 작은 손에 들고 흔들며 상점 쇼윈도며 오래된 책 냄새 폴폴 풍기는 고서점들을 둘러보며 엄마는 소녀처럼 즐겁게 웃었다.


“불문학과에 입학한 게 언제인데, 이제야 프랑스에 와서 바게트를 먹어 보네?”

대학시절 꿈꾸었던 ‘파리행’을 이룬 나이든 소녀의 웃음을 보며, 혼자 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슬며시 바뀌었다.


서로에게 다행인 시간이었다. 엄마와 한 달간, 언제 또 그런 시간을 갖게 될까. 가지려면 가질 수 없는 시간도 아니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파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엄마와 한 달 또는 그보다 짧은 시간이라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집에서도 함께일 수 있다. 그런 시간도 의미 있는 여행이고 일상일 것이다.


그렇지만 파리라는 공간을 엄마와 나눈 것은 분명 다른 의미가 있다.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모녀의 서로 다른 취향과 흥미가 한 곳을 향하는 여행은 결코 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서울, 바르셀로나, 로마, 하노이였다면 그 의미가 조금이라도 퇴색했을지 모른다.

우리 두 사람의 취향과 목적이 향하는 파리는 그래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공간이었고, 꼭 가야 할 이유를 갖는 공간에서의 시간은 당연하게도 ‘특별’했고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