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취향>> 중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한두 번 여행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하게 된 것일까. 한순간 허세가 좀 있었던가 보다.
기간이 좀 되는 여행에 운동화, 플랫 구두, 웨지 슬리퍼 세 종류의 신을 준비했다. 하루 이틀 여행도 아니고, 좀 더 다채로운 사진을 담기 위해서 옷에 맞는 신발을 세 개는 가져가야지 싶었다. 다행히 운동화를 제외하고는 무게가 가벼운 것들이었다.
짐을 싸고 빼고 다시 싸는 과정에서, 공간을 차지하는 운동화가 아주 밉상이었다. 인천공항에서 가볍고 편해서 신고 있던 -분명 아주 편했던- 플랫 구두를 제외하고 운동화와 슬리퍼를 캐리어에서 빼버렸다. ‘운동화는 편하긴 한데 너무 무거워. 이걸 빼니 훨씬 가볍잖아. 지금 운동화를 살 시간이 없으니 첫 여행지에서 얼른 가벼운 운동화를 하나 사면 돼.’ 라고 생각하며 구둣발로 여행에 나섰다.
나는 평소에 꽤 많이 걷는 편이다. 그렇게 많이 걸을 때도 편하게 신던 플랫 구두니 여행지에서도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가장 편한 신발 중 하나였던 은색 펄 플랫 구두. 하지만 아무리 평상시 많이 잘 걸었다고 해도 여행지에서 걷는 것과는 ‘거리와 정도’가 달랐다. 걷는 게 몇 배로 늘어서 그랬는지 평소 편히 신던 구두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발을 아프게 후볐다.
쓰라린 발을 이끌고 런던에서 옥스퍼드, 파리를 거쳐 니스까지 여행한 게 신기할 정도다. 운동화를 살 시간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닌데, 볼 것 많고 갈 곳이 많아 뭘 사는 시간이 좀 헛되다고 생각했다.
신발을 살 기회는 번번이 뒤로 밀려났다. 꽤 많은 날을 머물렀던 파리에서 사야 했었다. 두 번째 방문인데도 이 도시는 어쩌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지….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고, 발 상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플랫 구두를 슬리퍼처럼 질질 끌고 다녔다. 차라리 벗고 걷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 건 파리여행 마지막 날이 되어서였다. 나는 만신창이가 된 발을 질질 끌며 간신히 니스로 갔다.
파리에서 떼제베(TGV)를 타고 6시간 걸려 남프랑스 대표 휴양도시 니스에 도착했다. 니스 역에서 트램을 타고 두 정거장 가서 눈앞의 골목으로 들어가자마자 내가 묵을 호스텔이 보였다.
마세나 광장(Place Masséna)과 니스 해변이 코앞인 숙소가 마음에 들었고, 숙소 아래 볕 잘 드는 카페가 있는 것도, 이 카페가 밤이면 Bar로 운영되는 점도 아주 좋았다. 발이 하도 아파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라 미처 못 봤는데, 숙소 앞 작은 길을 건너면 바로 백화점이 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방에 짐을 부리고 리셉션 데스크로 갔다. 여행정보와 신발 상점에 관해 물을 참이었다. 데스크에는 문의하려는 투숙객이 많아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키 크고 머리가 노란 동양 여자애가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파리에서 같은 숙소에 묵었던 아이였다. 말 한마디 안 해본 사이라 기억을 못하고 있었는데 그 아인 날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니스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새로운 인연이 생겼다.
여행길에서 누군가를 알게 되면 통성명도 하고 서로의 여행 이야기를 나누기 마련인데, 우린 알게 된 지 5분 만에 함께 ‘쇼핑’을 하기로 했다. 일단 나는 신발이 급했다! 더 걷다가는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맨발로 걷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일단 길로 나서긴 했는데 처음인 니스에서 게다가 길치인 내가 어디로 가야 신발 가게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괜히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숙소 맞은편에 있는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백화점에 진열된 예쁘고 반짝반짝한 눈 돌아가는 상품들 어느 것 하나 볼 기운이 없었다. 곧장 신발 코너로 가서 만신창이가 된 발을 보여주며 아주 편하고 가벼운 신발 하나 달라고 했다. 내 발을 보는 점원의 표정에선 측은지심이 느껴졌다.
점원이 내준 운동화는 일명 프랑스 ‘국민 신발’이라 불리는 벤시몽(Bensimon)이었다. 하, 이게 왜 국민 신발인지 알겠다. 상처투성이인 발이 한결 편해졌다. 니스 여행 첫날부터 지옥과 천국을 모두 경험했다.
발이 편하니 걸음도 착착 날을 듯 가벼웠고, 그제야 친구에게 이름 물어볼 여유가 생겼고, 니스에서 가장 궁금하던 바다와 니스 성이 떠올랐다. 밝은 햇살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마세나 광장을 지나 니스 성으로 가는 길에 광장 바닥의 타일 색과 주변 건물 색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타일과 주변 건물 색이 모두 파스텔 톤이라 그럴 거라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분명 아까 지나온 길인데, 낯설었다. 발이 편하니 세상이 달라 보이는구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여행지 신발 실수 이후 나는 꼬박꼬박 아주 편하고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여행길에 나선다. 발이 편해야 여행이 편하고, 삶이 편하다. 발이 불편하면 좋은 곳에서도 좋은 줄을 모른다. 좋은 곳으로 향하기 어렵다.
‘좋은 신은 좋은 곳으로 데려가준다’는 말은 분명 진리다. 꼬박꼬박 좋은 신을 신고 여행하는 건 걸음걸음 좋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