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취향>> 중에서
여행에서 숙소는 베이스캠프다. 숙소는 여행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여행 숙소’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 추적추적 지루하게 내리던 비를 맞으며 도착한 런던 게스트하우스다.
한국이나 유럽이나 한창 더운 7월 초, 맥시 드레스에 얇아서 속이 비칠 정도인 시폰 가디건만 걸치고 도착한 런던은 비가 자주 와 계절에 상관없이 추웠다. 아마 첫 나홀로 여행, 첫 여정지라는 긴장감까지 더해져 더욱 쌀쌀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길치인 나인데 웬일로 히스로 공항부터 피카딜리 서커스 역 근처에 자리한 숙소 근처까지 잘도 찾아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비 오는 거리에서 쩔쩔매다가, 간신히 숙소로 연락했다. 달려 나온 숙소 사장님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숙소는 빌라촌에 있었다. 늦은 오후라 투숙객들 모두 방을 비워 숙소는 텅텅 비어 있었다. 지금 같으면 도착과 동시에 짐을 대충 꾸려 밖으로 나가고 볼 텐데, 그때는 그저 쉬고만 싶었다.
14시간의 긴 비행으로 지친 데다, 비도 맞았고 정신도 없었다. 그러나 지나친 피곤에는 잠도 오지 않는 법. 눕지도 앉지도 못하고 오도카니 빈방을 지키고 있으니 투숙객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나보다 좀 이른 시간에 도착해서 첫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친구, 더 늦게 도착해서 같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에 있던 친구, 밤늦게야 숙소에 도착한 친구 등. 같은 방을 쓰는 친구들과 금방 친해져 밤늦게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이어 가다 어느 순간 스르르, 풀썩, 잠이 들어버렸다.
아침이 되어 정신을 차린 건 이제는 투숙객에서 친구가 된 이들이 흔들어 깨울 때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아침식사를 위해 부엌으로 갔다. 하룻밤 내리 자고 났는데도 피곤이 안 풀린 데다 딱히 입맛도 없었다. 게다가 닭고기에 닭국이라니 아침부터 좀 과해 보였다. 사장님이 (집안일에 잔뼈가 굵어 보이는 아저씨도 아닌) 유학생이라는데 아침식사 준비를 제대로나 했을까, 걱정스러웠다. 본인 먹을 것도 제대로 못 챙길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이 만든 실험식을 먹는 건 아닌지, 의심으로 한 숟갈을 떴지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른 아침에(지금 생각해보면 조미료를 썼을지도 모르겠지만) 특별할 것 없는 재료로 기대 이상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우리 엄마 말고 또 있었다. 같은 방 친구들과 한자리 제대로 차지하고 앉아서 국에 밥을 말아 양껏 먹었다. 아침식사를 하며 이 숙소의 장점은 밥이구나, 깨달았다.
전날부터 숙소의 장점을 찾으려고 무던히 애쓰던 참이었다. 사장님의 친절함과 주요 여행지에서 가까운 좋은 위치 외에 도무지 장점이라고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우울해지던 참이었다. 좋은 위치에 맛 좋은 식사까지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긴 한데…
아무리 날씨가 좋지 않은 런던이지만, 침대와 이불이 심하게 축축했고, 집안 곳곳은 깨끗한 것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남자 사장님이라서 그런가 하는 성차별적 판단을 내리려던 때, 그나마 단점을 일부분 상쇄했던 게 사장님의 음식 솜씨였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단점이 많은 곳이었다기보다는 나와 잘 안 맞는 곳이었을 뿐이다. 나중에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 숙소에 만족한 친구들도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런던의 숙소를 고를 당시, 나는 나의 숙소 취향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미숙한 여행자였던 거다.
숙소를 고를 때 나에게 중요한 부분은 ‘청결’이다. 위치나 식사, 안전 등도 고려 항목이지만 청결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유별나게 깔끔한 성격이라서가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최소한으로 지키고 싶은 안락함 때문이다. 낯선 공간을 내 취향과 체취로 채우려면 일단 그 공간이 비워져 있어야 가능하지 않은가 싶다.
내가 경험한 숙소들은 호텔, 펜션, 리조트, 민박, 호스텔, 집 렌트, 게스트하우스 등 여행지가 늘어날 때마다 그 종류도 다양해졌는데, 가장 좋아하는 형태는 호스텔이다. ‘깨끗하고 위치 좋은 호스텔’이 내가 생각하는 최적의 숙소다. 나중에 또 바뀔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 호스텔은 ‘다양한 친구와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 홀로 여행을 즐기며, 약간의 결벽증이 있는 길치’인 내게 가장 잘 맞는 숙박 형태다.
호스텔을 좋아한다고 하면 굉장히 털털하고 어느 정도의 소음이나 더러움에 무딘 사람일 거라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못한 게 나도 아쉽다. 소음은 어느 선까지는 견딜 만한데, 청결은 양보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가장 맞지 않았던 숙소는 국내외에서 경험한 민박, 한인 민박이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이 갖는 마치 단체 기숙생활 같은 성격이 맞지 않았던 것인데, 특히 일정한 시간에 한 테이블에 앉아 최대한 빠르게(부엌과 식당이 넓지 않으므로 못 들어온 투숙객들의 식사를 위해 자리를 빨리 비워줘야 한다) 우걱우걱 밥을 먹는 것이 문제다. 나와 다른 취향의 여행자는 단체 식사를 ‘정’이 있는 가족식사 같다고 여기기도 하던데, 내게 그건 정말 참기 힘든 부분이다.
여행에서 아침시간은 중요하다. 여유를 갖고 식사하며 여행 책자나 스마트폰을 보며 일정도 점검하고, 계획도 세우고, 식사가 끝난 후에는 커피나 디저트를 들며 아직 덜 깬 정신도 차려야 하는 시간이다.
호스텔도 식사 시간이 있지만 좀 더 긴 편이고, 민박보다는 상대적으로 건물 규모가 크기 때문에 넓은 공간에서 자유롭게 식사하는 게 가능하다. 게다가 호스텔의 또 다른 장점인 여행정보는 식사 테이블에서 얻는 경우가 많다.
나는 홀로 여행을 즐기는, 아직은 가 본 곳보다 가 볼 곳이 많은 여행자다. 그러니 낯선 여행지에서는 다른 이와 정보를 나누는 게 무척 중요하다. 어느 숙박 형태에서나 리셉션 데스크에서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보다 중요한 건 여행자들 사이에서 얻는 정보다.
리셉션에서 추천하는 일반적인 여행지의 정보가 아니라, 여행자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생생하게 펄떡거리는 정보, 이건 문화적으로 건축학적으로 폐쇄적인 숙소에서는 얻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런 살아있는 정보는 호스텔에서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많다.
특히 다국적, 다문화의 여행자들이 모여 서로 정보와 경험을 교환하고 여행자라는 데 동지애를 느끼며 스스럼없이 친해지고, 때로는 취향과 사고가 꼭 맞는 여행베프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곳은 역시 호스텔이다.
여행자는 끊임없이 머무는 존재다. 어쩌면 낯선 숙소에서, 때로 길 위에서 또는 집에서 여행자는 머무르는 것을 반복하고 이어간다. 그러니 여행자에게는 자신이 자리 잡는 공간에서 자신을 어떤 형태로 담아낼지, 그 공간을 어떤 방식으로 경험할지, 그 공간이 어떤 필요충분조건을 갖춰야 할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머무는 공간에서 오래 살건, 잠시 잠깐 머물건 자신에게 맞는 공간을 찾는 게 중요한 거다. 머무는 데도 취향이 있는 거다.
여행자 취향에 맞는 공간의 ‘조건’이란 매우 유연할 수 있다. 내게는 청결함이 중요하지만, 때때로 내가 원하는 공간의 조건이 늘 선호하던 ‘청결함’이 아닌 ‘낯설고 나의 취향과는 다른 새로움’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주요 관광지와의 짧고 편리한 경로가 좋은 숙소의 조건일 수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숙소 내부의 안락함이나 맛있는 식사가 중요할 수도 있다. 여행자마다 다양한 취향이 있으니 각자 머무는 공간을 특징짓는 조건 역시 무수히 많다. 중요한 것은 여행자 자신의 취향을 아는 것이다.
그 순간, 그 시점에서 나의 취향을 파악하는 것. 여행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인 만큼 자신을 잘 아는 자의 여행은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