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여행의 취향>> 중에서

by sari 고나희

여행지를 떠나며 다시 올 것을 생각하는 건 아쉬움 때문이다. 아쉬움은 즐거움 또는 행복의 다른 이름. 여행지에서 받은 즐거움과 행복이 크면 떠날 때의 아쉬움도 크곤 했다.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에 도착하면서, 생애 가장 큰 아쉬움을 느꼈던 몇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마음 안에 몰래 넣어두었던 약속을 몇 년 만에 지키게 됐다. 파리와 6년 만의 재회였다.


재회한 파리에서 깊고 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긴장한 탓이었나, 파리가 편해서였나, 아니면 그들에게 지쳐서일지도 몰라. 유럽여행 첫 나라 영국에서 하필 만난 사람마다 영국은 깔끔하고 안전해서 마음이 편한데 파리는 도둑과 소매치기가 많다고 하니 불안하다고 했다. 런던을 좋게 그리고 런던에 비해 파리를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계속 만나며 피로감이 밀려왔다. 어쨌든 그들과 달리 난 파리에 가는 날만을 기다렸다.


동행자 없이 홀로 하는 여행, 처음 간 곳이 런던. 지금 생각하면 좋은 추억도 꽤 있는 곳인데, 그리 즐기지 않았던 것 같다. 혼자 시작하는 여행의 첫 나라, 첫 도시에서 나는 많이 긴장하고 떨었고, 그래서 편하지 않았나 보다. 일반적으로 많은 여행자에게 깨끗하고 안전하다는 평을 받는 것과는 별개로, 내게는 불편하고 ‘이국’이라는 낯선 느낌이 또렷했다. 그리고 보다 큰 이유가 있었으니, 제국주의의 선두주자라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반면 파리는 유럽여행 몇 년 전 한 달 간 머물렀던 곳이다. 취향 면에서 전공 면에서 파리, 프랑스에 호감을 갖고 있었고, 프랑스 역사와 문화에 익숙했다. 게다가 나는 근대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있는 도시 여행을 좋아하는 여행자였다. 그러니 파리는 내게 여러모로 편안하고 안정감을 주는 공간이자, 문화적 감흥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 역을 나오자 익숙한 도시 풍광이 모습을 드러냈고, 거리의 표지판과 광고판, 불규칙해서 여행 가방을 끌기에는 불편한 보도블록까지 익숙하면서도 특별했다.


이전에 파리에 머물렀던 시기는 파리 특유의 매력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계절이 시작되는 때였다. 여름을 막 지난 초가을에는 스산함과는 거리가 먼 포근하고 부드러운 가을빛이 흐른다. 그 사이로 물드는 가을은 눈과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봄이 주는 풋풋한 설렘과는 다른, 뭔가 느긋하고 여유로운 서로를 잘 아는 사람들이 홈파티를 하기 직전의 설렘 같은 게 진하게 묻어난다. 내가 기억하는 파리였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 하면 우리나라인데…. 처음 만났던 파리는 익히 들어왔던 기후의 변화무쌍함을 보여주는 대신 맑고 밝은 하늘을 내내 보여줬다. 재회한 파리의 첫날도 아름답고 푸르니 고마울 따름이다. 일상과 여행을 포괄하는 삶에서 날씨가 차지하는 비중이란 상당히 커서, 날씨에 따라 내가 자리한 공간을 인식하는 바가 달라질 수 있다. 맑고 화사한 날씨는 공간에 긍정적이고 좋은 인상을 주는 반면, 안 좋은 날씨는 공간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 수 있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곳이라도 그걸 인지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그러니 내가 파리를 긍정하는 것은 공간 특유의 매력과 한국에서부터 그곳에 가진 호감에 더해, 갈 때마다 좋았던 날씨 덕도 클 거다.


역에서 역으로 그리고 역에서 숙소, 2층 방으로 캐리어를 질질 끌며 비 오듯 땀을 쏟았던, 재회의 첫날. 난 같이 방을 나누어 쓰는 이들과 인사도 못 나누고, 씻지도 못한 채 그대로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여행에서 언제나 가장 설레는 부분이자 힘든 부분은 역시 ‘이동’이다. 도시에서 도시로의 이동이자, 섬에서 대륙으로의 이동이었다. 홀로 여행의 시작이었던 런던에서 긴장한 탓인지, 유로스타에서 달달달 추위에 떨며 와 그런지 노곤함이 온몸을 덮쳐왔고, 익숙한 파리에 도착했다는 편안한 안도감이 더해져, 깊고 깊은 잠 속으로 빨려들었다. 침대 안으로 깊숙이 가라앉으며 그리웠던 이곳을 반갑게 대면할 아침을 꿈꾸는 것은 즐겁다 못해 행복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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