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취향>> 중에서
여행그릇, 여행을 오롯이 담고 남기는 것. 찰나의 순간과 감흥을 담고 남길 수 있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이 행하고 느낀 바라도, 실체 없는 경험과 감정을 온전히 담고 남길 수 있는 여행자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어쩌면 불가능한 일임에도 많은 여행자가 사진을 찍고, 기념품을 사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여행을 기록하고자 하는 건 소중한 것을 객관화하고 대상화해 결국은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투영일 터. 나 역시 꽤 오랜 시간 동안 기록과 사진이라는 여행그릇을 통해 나의 여행을 담고 남겨 왔다. 내가 기록과 사진을 여행그릇으로 택한 건 글을 쓰고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는 가장 값 싸고 작은 부피와 가벼운 무게를 가진 여행그릇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동안 그리 넉넉지 않은 여행자였던 난 때때로 여행비용에 여유가 조금 생기면 열쇠고리나 배지, 엽서 따위 소박한 기념품을 사는 사치를 부려보곤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나의 여행을 담는 그릇이 될 수는 없었다. 내게 그것들은 별다른 의미 없이 쉽게 살 수 있고 보관이 수월했던 물건일 뿐이었다. 무릇 여행그릇이란 내 여행의 의미와 기억을 담고 남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상당한 기간 그 역할은 기록과 사진이 수행해왔다. 그러다 특정한 아이템을 또 다른 여행그릇으로 삼게 됐다.
자신만의 여행 기념품을 수집하는 여행자들을 보며 흥미롭다고 느꼈다. 타이베이에서 만난 한 친구는 착하게도 여행하는 내내 가족 생각을 하고 가족에게 가져갈 선물만을 사고 자신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사지 않더니, 공항에서 출국 전에 대만 지도 모양의 열쇠고리를 딱 하나 자신을 위한 기념품으로 골랐다. 그 친구가 자신의 방을 찍은 사진을 보여줬는데, 사진 속 방에는 벽에 붙여둔 투명한 고리마다 여행지에서 사온 열쇠고리가 걸려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함께했던 친구는 여행지에서 기념엽서를 사서 자신에게 편지를 쓴다고 했다. 그 편지를 받아 수집하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느꼈던 감상에 자신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나 격려를 덧붙여 집으로 엽서를 보내는 것은 여행지에서만 해 볼 수 있는 뜻깊은 체험이고, 여행을 마치고 집에서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받아 보는 것 역시 의미 있는 경험이라고 했다.
많은 여행친구들이 여행지에서 마그네틱을 사서 냉장고나 철제 가구 에 붙여둔다. 마그네틱 수집을 무척 좋아하는 한 블로그 친구는 섬세하게 제품을 고르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블로그에 올려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덕분에 이웃 블로거들로부터 다양한 여행지 마그네틱을 선물받기도 했다. 나도 마그네틱을 보면 이 친구가 생각날 정도다. 열쇠고리, 배지, 엽서, 마그네틱, 달력 등 다양한 기념품이 여행지의 특징과 수집하는 사람의 취향을 반영하며 수집자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나는 인형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인형은 여행지의 특색과 문화를 가장 잘 담고 있으며, 인간 삶과 문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여행지 특유의 의상이나 머리 장식을 갖추거나, 그 지역의 문화나 신앙을 드러내는 인형을 보면 마치 여행지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난 듯 반갑고, 이 친구와 함께 집에 돌아와 여행을 추억하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여행지에서 만나 함께 여행하고 내 집에 안착한 인형들, 이들은 여행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그 기억을 나와 공유하는 것 같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여행 친구다. 표정도 모양도 제각각인 이들에게서 읽어내는 여행지 특유의 문화와 관습이 흥미롭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다른 표정을 지으며, 다른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다. 어떤 이는 인형은 사람을 닮은 것 같아 무섭지 않냐고 하지만, 난 사람을, 나를 닮은 그들이 친근하다.
내 여행과 일상, 삶의 공간을 나누며, 나의 삶을 나의 취향과 방식으로 담아내주는 여행그릇인 그들이 고맙고 친숙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