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한 시간

<<여행의 취향>> 중에서

by sari 고나희


삶에 늘 의미 있는 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별거 아닌 일에 시간을 쏟고, 그 때문에 정작 중요한 일이 지체될 때가 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실수와 낭비 또한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되어 이야기를 남기고, 의미를 만들어 나의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발이 여행에서 갖는 중요성이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데 번번이 발을 혹사하는 걸 보면 나는 여전히 미숙한 여행자인가 보다. 연구소 일로 떠나온 교토 출장에서도 내 발은 여간 고생한 게 아니었다. 교토는 우리나라 경주와 문화적, 지리적 성격이 비슷한 곳. 사찰과 유적지가 많아 좋기는 한데 주요 명소가 곳곳에 퍼져 있고, 명소까지 대중교통이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뚜벅이로 다녀야 했다.

고다이지를 끝으로 여행 일정을 마무리하는 날이었다. 하루 동안 발이 부르트도록 다녔으니 숙소에서 지친 발을 쉬어도 좋았으련만, 나와 동료 둘은 버스를 타고 힘겹게 기온까지 갔다. 우리에겐 나름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발 파스를 사는 것!


7시, 초저녁이지만 교토에는 밤이 일찍 찾아왔다. 상점과 식당, 건물에 불이 꺼지고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에도 이미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다. 그나마 기온 거리는 일반적인 교토의 저녁과는 다르게 띄엄띄엄 불빛이 보여 다행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어두운 거리를 배경으로 오렌지색의 야사카(八坂) 신사가 화려한 모습을 드러냈고, 신사 앞으로는 한국의 명동이라고 할 만한 기온 거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차양이 드리워지고 등불이 밝혀진 운치 있는 기온 쇼핑가에서 우리가 사고 싶은 건 오로지 발 파스였다. 일본에서 파는 발과 다리 전용 파스는, 효과가 정말 좋아 짧은 시간 안에 통증이 완화되곤 했다. 그러니 이 파스는 나를 포함한 동료들의 여행 필수품이었다. 교토여행은 직원 교육 차원의 출장이라 많은 곳을 다니는 일정이었고, 하루에 걷는 양이 상당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나면 발바닥, 발목, 종아리가 사정없이 아팠는데 이걸 이겨낼 수 있었던 건 발 파스와 입욕제 덕분이었다. 입욕제를 욕조에 넣어 탕 목욕을 하고 바로 발과 다리에 파스를 잔뜩 붙이면, 피로가 한결 풀리고 살 것 같았다. 파스 덕분에 다음 날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중요한 파스가 여행 3일째 저녁에 똑 떨어졌다. 좀 더 넉넉히 사둘걸, 그렇게 많이 쓸 줄 몰랐었다. 우리는 다음 날을 위해 반드시 피로를 풀어야 했다. 여럿이 움직이는 일정인데 몇 사람이 체력 약한 여자라고 눈치를 받을 수는 없었다. 강한 의지를 품고 파스를 사러 밤거리로 출동했는데, 숙소 근처 약국과 편의점을 뒤지고 뒤져도 우리가 찾는 제품이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결국 버스를 잡아타고 큰 드럭스토어가 있는 기온 밤거리에까지 나서게 되었다.


양손 가득 파스를 사와 붙이고 잔 덕분에 다음 날 아침 좋은 ‘다리 컨디션’을 가질 수 있었지만, 우리가 기온 밤거리에서 보낸 시간은 정말 의미 없는 시간이었다. 귀중한 밤 시간을 숙소에서 하루의 여행을 정리하며 되새겨보고, 다음 여행지를 계획하는 등 의미 있는 일로 보낸 게 아닌, 파스 따위를 사는 데 뿌리다니.

교토여행의 낭비한 시간을 돌아보며 나는 그 낭비가 여행에서만 있는 일이 아님을 느낀다. 나는 하루의 많은 순간을 낭비에 ‘바치고’ 있다.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토막잠을 자거나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잠을 깨우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음악을 듣는 등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알뜰하게 시간을 보내는 대신, 어서 지하철이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바라며 ‘멍 때리’며 앉아 있는 시간이 참으로 많다. 물론, 나는 ‘멍 때림’을 버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시간을 생산적인 활동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사실 이 멍 때리는시간을 즐긴다.

나의 일상과 여행에, 삶에 낭비한 시간이란 얼마나 많은지. 그런데 의미 없는 시간 허비한 시간 버린 시간도 삶에는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 시간이 모이고 모여 의미 있고 소중한 순간을 뒷받침하고, 뒤돌아볼 때 살포시 웃음 나는 재미있는 추억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니 말이다. 여행과 일상이 반드시 의미 있는 것으로만 연결되고 가득 찬다면 오히려 ‘의미’를 찾는 건 어려울지도 모른다. 언뜻 그렇게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삶에 의미 없는 것이란 없다. 그 시간도 나의 여행이고 일상이며, 삶이고, 나 자신이니.


이렇게 글을 쓰는 걸 보면, 기온 밤거리에서의 시간도 낭비한 시간만은 아니었음을 방증하는 것 같다. ‘낭비, 헛된, 의미 없는’ 등의 말로 나의 여행, 일상, 삶, 존재의 의미를 낮추고 싶지 않다. 의미가 쉽게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의미를 찾다 보면 일상 같은 여행, 여행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건 아주 쉬운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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