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은 오래도록 관심 두어온 주제이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온 나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개인의 취향을 확장해 다른 이들과 나눌 일반적인 가치로 전환하고자 했고, 그 가치를 톺아보고자 했다. 비가시적인 취향이라는 실체를 다루기 위해 매개가 필요했다. 매개는 여행이 되거나 책이 되었고, 이제 공간과 장소로 확장되고 있다. 오래도록 함께한 신촌이라는 공간이자 장소를 매개로 취향을 담고자 한다.
2020년 4월만 해도 신촌에 대한 어떤 느슨한 생각이 있었을 뿐이다. 생각이 글이 된 데는 국문학 대학원 동기, 선영의 역할이 컸다. 신촌과 취향이라는 느슨한 실타래를 어떻게 엮을까, 맘은 깊고 진한데도 선뜻 잡히지 않았다. 영민한 친구가 내가 만들지 못하던 윤곽을 찾아내 줄 거라는 뻔뻔한 믿음과 함께 그에게 실타래를 던졌다.
역시나, 문학자판기처럼 적절한 레퍼런스를 툭툭 뱉어내던 그녀 덕분에 흐릿한 생각이 또렷한 윤곽을 얻을 수 있었다. 독자의 가장 긍정적 역할과 기능이 작가에게 글을 쓸 자극을 주는 것이라면 친구는 이미 이상적인 독자일 것이다. 《독서의 취향》에서 다룬 작가가 된 독자의 모습을 그에게서 보았다.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한 것처럼 독자는 언제든 필자가 될 준비가 되어있기 마련이니까.
윤곽이 마련된 글 안에서 신촌을 사적인 동시에 공적으로 사유하고자 했다. 도시의 ‘산책자’를 자처하며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파리 곳곳의 모습과 인상, 그에 대한 사유를 담았던 벤야민처럼, 신촌이라는 곳을 대하며 도시풍경에서 건져 올린 상념과 사유, 현재의 모습이 밀어낸 과거의 기억과 기억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담고자 했다. 내게는 벤야민과 같은 천재성이 부재하기에 나의 도시 이야기에는 그와 같은 견고함이 부족할 테지만, 내가 살아가고 일하며, 생활과 정체성의 터전을 둔 지역을 담고자 한다.
공간이 추상적·물리적 개념인데 반해, 장소란 사회적·역사적 개념으로, 기억과 경험이 있는 곳이다. 공간이 장소가 되려면 역사, 정서적 유대, 기억 등이 축적되어야 한다(그럼에도 대중적인 쓰임이 장소의 개념으로도 ‘공간’을 사용하는 빈도가 높아서 이 글에서도 공간과 장소의 구분 없이 거의 공간으로 통일하여 쓴다). 신촌은 내게 개인의 역사와 기억, 정서를 지닌 장소인 한편 많은 이에게 문화적으로 그리고 상업적으로 소비되는 공간이다. 신촌에 관한 개인적인 기억의 많은 부분이 대학 이야기인데, 신촌은 대학가이니 대학 생활을 바탕으로 이야기한다면 그건 개인적이면서도 공적인 것이 될 거라 전제했다.
신촌은 오래도록 의미적 변화를 거듭해 온 공간이다. 신촌이 처음 입은 공간적 옷은 대학가였다. 서울에 순수한 대학가로서 동시에 상업적 번화가인 곳은 어쩌면 지금도 신촌이 유일하다. 홍대, 이대, 대학로, 건대 등 대학이 자리한 곳은 그 외에도 있지만, 대학문화와 상업문화의 혼재를 찾아보기 힘들다. 한 때 대학가를 대표했고,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예술문화의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는 대학로는 상업적 공간으로 보기는 힘들고, 상업적으로 번화한 건대 앞은 터미널을 이용하는 이들과 맛의 거리를 찾는 직장인, 조선족 생활권도 함께하여 대학가를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느 공간이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의미도 변한다. 신촌은 새로움과 시작의 이미지를 지닌 대학가로 시작됐다. 1970~1980년대 대학생과 대학공간이 청년문화를 주도했고, 대학생이 지식인이자 문화인을 대표할 때, 신촌은 새롭고 세련된 한편 지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소비하던 곳이었다. 1990년대 한국사회가 대중소비사회로 전환된 사회적 배경과 함께 대학 진학률의 증가로 대학과 대학생이 지니던 특별한 정체성이 사라졌다(이전에는 대학생이 지식인으로 특별히 규정되었고, 대학생을 비롯한 지식인층이 문화의 주체로 문화를 선도하던 것에 변화가 일었다). 구매력 있는 계층인 직장인이 대중문화를 이끌며 이태원, 강남으로 문화의 거점을 빠르게 이동시켰다.
더불어 어떤 지역보다도 젠트리피케이션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신촌 부근의 홍대가 그곳만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문화적으로나 상업적인 영향을 확장하며 사회적 관심과 집객력이 높아지며 인접한 신촌에 대한 관심을 줄게 했다. 2014년 연세대 국제캠퍼스의 개교와 신입생의 송도 이동이 진행되며 유동인구가 낮아지는 등의 변화 때문에 공간으로서 신촌의 명성은 이전에 비해서 낮아졌다.
그러나 어느 공간이나 발전과 쇠퇴를 거듭할 수 있기에, 이런 모습이 신촌만의 문제나 단점으로 치환되기는 어렵다. 신촌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대학생의 모습이 바뀌었는데 그들의 대학가가 이전과 같을 수도 없다. 상반돼 보이는 문화와 여러 갈래의 가능성이 혼재하는 신촌의 특수성도 여전하지만 시대에 따라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제 신촌은 ‘동네’라는 현재성을 토대로 또 다른 새로움과 특수성이 형성되고 있는 곳이다. 한동안 잊혔던 ‘동네’가 요즘 들어 다시 주목받고 있고, 젊은 층 중심으로 로컬 생태계라는 지역적 문화권·상권을 위시한 취향권 그리고 취향권을 바탕으로 한 느슨한 연대가 소비되고 있다. 동네를 기반으로 한 온오프라인 커뮤니티가 만들어져, 동네 커뮤니티에서 동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공유한다. 커뮤니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우리 동네 어느 가게에서 히든 아이템을 살 수 있는지, 어느 곳에 걷기 좋은 산책로가 있는지, 그 산책로 끝자락에 혼밥 하기 좋은 어떤 가게가 있는지, 식사 이후 커피 한 잔을 책임질 수 있는 카페는 가게에서 몇 걸음쯤 되는지 등을 공유하며 댓글과 대댓글로 소통한다.
취향 공유나 재능 기부를 기반으로 한 소모임이 온오프라인 양방향에서 진행된다. 동네 작은 가구 공방에서 인스타그램으로 가죽 소품 만드는 소모임이나 클래스의 참여자를 모집하고, 공방에 모인 참여자들은 가죽 소품 만드는 걸 체험하며 취향과 재능을 나누고 더불어 동네 소상공인의 상업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영향을 주고받는다. 죽어간다고 여겨지거나, 잊혔던 동네의 문화가 다시 구성되고 향유된다. 신촌 역시 서울 서대문구의 한 동네이다. 지금의 신촌이 과거의 신촌과 어느 정도 연결되면서도 또 다른 동네 문화를 보여주고 있는 현재, 이곳은 과거의 공간에서 다시 생각해 볼 장소로 의미를 획득한다.
이와 같은 이유가 차곡차곡 쌓여 신촌이라는 공간에 다가갔다. 그곳을 기억하고 사유하며 되새겼다. 신촌이라고 하면 과거부터 현재까지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대학가, 젊음, 시작, 출발, 대학 문화’ 따위로 떠올렸고, 그 이미지들이 지닌 의미를 찾고자 한다. 신촌이 한창 대학가로 활성화된 당시 그곳을 경험하지는 않았고, 한창 핫플레이스이던 때를 경험하지 않았기에 더욱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거라고, 적당한 거리에서 지역이 지닌 의미를 활자화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