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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i 고나희 Apr 19. 2023

연희향유_내 곁의 취향 공간

신촌기차역과 그 주변

봄과 가을, 중간시험과 기말시험은 하필 가장 좋은 계절에 있다. 캠퍼스를 물들이는 봄꽃과 말간 가을 햇살을 멀리하며 벼락치기 밤샘으로 반 학기나 한 학기 분량의 정보를 머리에 욱여넣느라 고단했을 학생들에게 시험의 끝은 해방감이다. 여름 무더위나 겨울 추위쯤 아랑곳하지 않고, 해방감을 만끽하는 데 학교 앞은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시험이 끝나면 웬만한 동아리는 서울 근교로 1박 하며 함께 놀 기회를 마련하는데, 많은 경우 강촌이나 춘천으로 향한다.

산과 물이 함께하는데도 부담 없는 거리의 서울 근교 여행지인 때문이다. 바다까지 가기는 멀고, 높은 산을 오르자니 부담스러울 때 서울 근처에 나지막한 산과 잔잔히 흐르는 개천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곳이 경의선을 따라 차례로 자리하고 있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서울을 벗어난 느낌을 완연히 주기에 적당히 부담 없는 자유와 해방을 경험할 수 있다.

신촌기차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강촌이나 춘천 방향으로 기분 좋은 낭만과 달뜬 설렘을 담아 달린다. 경의선을 따라 1시간만 가도 서울과는 다른 풍경이 이어진다. 기차는 출발과 함께 공간과 시간을 달리하여, 익숙한 도시 모습은 낯설고 새로운 풍경으로 대체된다. 기차 차창 밖의 풍경도 한편으로는 일상적인 것일 텐데, 기차의 속도감은 순간순간 낯선 새로움을 자아낸다.  


‘새로움’은 설렘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모두 불러일으킨다.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막 넘어온 대학생은 대학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양가적인 감정을 지닌 새로움을 맞닥뜨린다. 어쩌면 이런 종류의 설렘과 두려움이 고향에서 좀 먼 지역으로 가족을 떠나 홀로 낯선 공간을 대하는 이들의 것으로만 생각될 수 있지만, 실은 나고 자란 곳에서 여전히 가족과 함께라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미성년과 성년의 경계가 그렇다. 어른이 아닌 존재와 어른이라는 존재가 그런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낯설게 대면하는 공간과 새로이 시작되는 인연, 아직 서툰 어른의 문법 등 새로움이 덮쳐드는 것이다.

아직 저쪽 세계에서 온전히 벗어난 것이 아닌데, 이쪽 세계에 발 들여야 한다. 성큼 들어서야 할지, 상황을 살피며 조금씩 움직여야 할지 쉽사리 판단이 서지 않기 마련이다. 아직 10대의 세계와 감정에 익숙한데 갑자기 20대의 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른답다고 여겨지는 행동과 가치관이 강제되기 시작한다. 그런 새로움은 묘한 긴장과 두려움 그리고 동시에 빛나는 자유와 해방을 느끼도록 한다. 양가적인 감정을 자아내는 대표적인 곳이 대학가이고, 대학가를 대표하는 지역이 신촌이다. 경의선이 서울을 벗어나던 첫 역사(驛舍)가 신촌기차역이었고, 신촌기차역 주변으로 몇몇 대학의 문화와 활동 반경이 교집합처럼 맞물려 있다.


긴 공강이 이어질 때면 잠시 학교를 벗어나 쉼이나 여유를 즐길 수 있던  <독수리 다방> <민들레 영토> <미네르바> <클로리스> 등의 카페도 신촌기차역 가까이 자리한다.  그런 카페들 주변에서 저녁부터 밤까지는 기타나 댄스 버스킹 공연이 이어지던 게 흔하다.    

대표적인 약속 장소인 백화점 앞 빨간 잠수정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거기서 조금 걸어가면 신촌 로터리에서 다양한 이벤트를 즐길 수 있었다. 학교 축제나 신촌 물총축제 기간이면 더욱 풍성해지던 이벤트 중 하나가 '스프라이트 샤워'였는데, 수지니 제니니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여성 아이돌이 찾는 꽤 큰 행사였다. 신촌로터리에 축제 기간이 지나고 축구 시즌이면 대형모니터가 설치되어 함께 응원하는 재미도 있었다.

신촌역 3번 출구에서 연세대까지 이어지는 지금의 연세로에는 고만고만하게 비슷한 크기의 가게가 많았고, 특히 여름에는 사은품과 전단을 함께 권하는 가게 직원들의 호객 행위가 이어졌다. 연세로에서 조금 안쪽으로 신촌 놀이터라 불리던 창천문화공원은 밤이면 치고 박는 싸움이 잦아서 누가 다쳤네 경찰이 왔네 하는 사건사고도 꽤 있던 어두운 곳이지만, <몰리스> <파이홀> 등의 오래된 디저트 가게가 주변에 자리한 달콤하고 밝은 공간이기도 하다.


이런 신촌의 모습은 꽤나 아기자기했다. 그 아기자기함은 대학가와 기차역이 자리한 동네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런 오밀조밀하고 잔재미가 있던 분위기가 점차 신촌에서 연남동으로 옮겨간 건 지리적 조건 때문이었다. 신촌은 행정구역상으로 신촌동이고, 신촌동은 연희동과 이어진다. 두 동네는 지리적으로 붙어있었고, 그래서 문화적으로도 가까웠다. 한때 신촌이 지니고 있던 재미와 명성을 이제는 연희동 특히 연희동의 남쪽인 연남동이 잇고 있는 것이다.

신촌이라는 대학가의 낭만이 대학생 외에 멋과 맛을 즐기는 이들을 불러 모으고, 어느새 낭만보다는 핫플 상업 지구로 변했고, 핫플이 겪기 마련인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어 핫플의 명성도 잃어버렸다. 아쉽지만 마냥 아쉬워하기에는 시대에 따라 또는 다른 많은 조건과 환경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인 공간의 생리를 고려하지 않는 것일 테니.

어쨌든 많은 이가 신촌에서 얻던 공간적, 문화적 즐거움은 슬슬 연희동으로 이동했다. 그렇다고 연희동의 모습이 신촌동과 같은 건 아니다. 신촌동이 좀 더 대학 문화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면, 연희동은 그곳에서 자유로움의 결을 확장했다. 연희동은 대학생만의 전유 공간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젊은 아티스트만이 차지하지도 않았다. 이를테면 이제는 오래된 주거 양식인 이층집과 그곳에 오래도록 살고 있는 주민이 예술과 상업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아기자기한 공방을 운영하는 아티스트와 학교 밖으로 걸음 한 대학생과 이질감 없이 자연스레 엮이고 어울리는 공간이다.


신촌기차역에서 신촌동, 연희동까지 이 부근은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고, 서로 다른 것들이 자연스럽게 얽혀 아가 자기 함을 자아내는 데 적절한 곳이다. 기차역 때문인지, 대학가인 덕분인지, 그 모두에서 연유한 것인지 새로움과 자유로움을 담아내는 공간이라는 점이 이전에도 지금에도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새로움과 자유로움의 가치는 맞닿아 있다. 나도 다른 사람도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고 지향하기에 어색함이나 불편함이 없다는 것은 행동이나 사고의 자유로움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기차가 출발하고, 성년으로 들어선 이들이 대학에 재학하고, 거주하며 신촌에는 새로움과 자유로움의 의미가 커졌다. 그리고 대학생이 아니더라도 많은 이가 이곳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살며 혹은 한 번쯤 찾아오며, 거쳐 가며 경험했다.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축적된 공간적 기억과 경험이 첫 독립을 앞두고, 처음 혼자 살 곳을 찾으며 신촌을 생각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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