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여름. -1
막 퇴근한 여름이 옷걸이에 겉옷을 걸었다. 하필 책 마감일이라 퇴근이 늦었다. 야근은 어느 날이고 싫지만, 금요일 야근은 특히나 더 싫다. 다른 사람들은 친구나 연인, 가족과 편안하고 조금은 특별한 시간을 보낼 금요일에 일하고 있다는 건 유쾌하지 않다. 세상에 자기만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진이 쏙 빠졌다. 혼자만 일하고 있는 거 같은 기분은 별로다. 혼자는 아니었구나. 여름과 같이 마감을 친 에디터와 여름 둘만 외따로 떨어진 것 같았다.
퇴근길 지하철 인파에 이리저리 치여 너무 지쳐 씻을 힘도 입맛도 없이 휴, 한숨을 쉬는 여름에게 엄마는 한 숟갈이라도 뜨라고 했다. 그렇게 식사를 거르면 몸 상한다면서 부엌으로 가서 딸의 저녁 식사 준비를 서둘렀다. 여름은 몇 번의 달그락거리는 소리, 탁탁탁 도마를 오가는 칼질 소리를 들으며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손 빠른 엄마는 얼른 식사 준비를 마쳤다. 식탁 위에 수저, 밥, 몇 가지 찬과 메인 요리까지 금세 자리를 잡았다. 입안이 까슬해서 먹을 생각이 없지만, 이쯤 되면 엄마를 위해서라도 뭘 좀 먹어야 했다.
“먹자. 여름이 좋아하는 LA갈비.”
여름의 엄마 다인은 딸을 꼭 그 이름으로 다정히 불렀다. ‘너, 니, 네, 야’ 따위의 표현을 쓰지 않고 늘 다정히 불러주었다. 평소 말하는 문장에도 딸의 이름을 넣곤 하는, 딸이 어릴 때부터 다정하던 엄마를 여름은 정말 좋아했다. 늘 웃으며 대해주고, 사랑한다는 말도 자연스럽게 자주 해주는 엄마가 제 엄마가 아니라 이웃 아줌마나 다른 누군가였어도 좋아했을 거라고 자주 생각했다. 벌써 몇십 년 보아온 엄마는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이 다정할 수 있을까. 반복되는 일상과 때로 찾아오는 힘든 순간에 느끼는 감정을 가족을 비롯한 타인에게 부정적으로 발산하지 않는 사람이 다인이었다. 그런 다인의 재촉에 자리에 앉아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들을 보던 여름은 조심스레 물었다.
“아빠……는?”
“오늘 늦는다던데? 갑자기 회식 있나 봐.”
순간 긴장했던 여름의 얼굴이 밝아졌다. 좋아하는 LA갈비가 눈앞에 있어서만도 엄마의 다정함이 지친 그녀를 풀어지게 해서만도 아니었다. 아빠의 귀가가 늦는 덕분이었다. 이제 여름은 밥을 한 숟갈 크게 떠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피곤해서 한술도 못 뜰 거 같더니, 고슬고슬해서 그 형태가 혀에 고스란히 느껴지면서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밥알 한 알 한 알이 부드럽게 입으로 목으로 차례차례 넘어가자, 뱃속이 따뜻해지면서 심신이 탁 풀어졌다. 여유라는 게 생겼다. 역시 탄수화물이 최고다. 모든 것에 대한 관대함은 탄수화물이 가져오는 것이라고 하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밥맛을 본 여름은 LA갈비로 젓가락을 가져갔다. 살코기와 뼈가 붙은 갈비 한 덩이를 집어서 베어 물자, 갈빗살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뼈에서 스스스 고기가 흘러내리듯 뜯겼다. 간장 양념이 적당히 밴 갈비를 먹고 나서 빨간 물이 먹음직스럽게 든 김치 한 조각을 씹자 감칠 맛과 개운함이 같이 느껴졌다. 고사리나물이며, 된장찌개를 맛보며, 따뜻하고 기분 좋은 냄새를 풍기는 음식들이 입안을 거쳐 가자 여름의 수저질이 바빠졌다.
“너무 맛있다, 엄마.”
다인은 그것 보라는, 흐뭇한 눈빛으로 딸을 쳐다보았다. 딸의 먹는 모습이 좋아서 그걸 보느라 그녀의 수저는 제자리였다. 엄마 앞에 놓인 밥이 식어가는 걸 본 여름이 재촉했다.
“엄마도 얼른 먹어. 같이 먹어야 맛있지.”
다인이 그제야 수저를 들었다. 그러면서도 딸에게 반찬 그릇을 밀어주며 챙겼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무엇이 모녀 사이에 머물렀다. 여름의 얼굴에 긴장이 사라지고 평온함이 자리 잡았다. 딸과 엄마의 머리 위에서 얼굴로 흘러내리듯 아른거리며 비추는 부엌 식탁 위 노란 조명만큼이나 소박한 포근함이 느껴지는 저녁은 퇴근 전 여름이 미처 기대하지 못하던 것이다. 그녀는 이만하면 칼퇴는 못 했어도 좋은 저녁이라며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