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를 하오 Part2

다시 피어나는 장미

by sarihana

제2장. 균열의 시작


차 안의 정적 속에서 장미는 한참을 앉아 있었다.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그녀의 시간은 고장 난 시계처럼 진단실 그 순간에 멈춰 있었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힘든 전화를 걸어야 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엄마의 번호를 눌렀다. “어, 우리 딸, 병원 다녀왔어? 별일 아니지?” 엄마의 밝은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그 평범한 안부가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날처럼 심장을 찔렀다. 장미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며 입을 열었다.


“엄마…”


“왜 그래, 목소리가 왜 그래?”


“나… 암이래.”


수화기 너머로 순간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지는 것은 엄마의 비명 같은 울음소리였다.


“안 돼… 안 돼! 우리 딸한테 왜! 내가 임신했을 때 뭘 잘못 먹었나,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길래…!”


비이성적인 자책이 울음과 함께 쏟아졌다. 장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전화기를 붙든 채 눈물만 흘렸다. 간호사인 동생 유진에게는 차마 목소리로 전할 자신이 없어 짧은 문자를 보냈다.


[언니, 암이래.]


그 시각, 유진은 병원 휴게실에서 막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참이었다. 손안에서 울리는 진동. 액정 위에 뜬 짧은 문장을 그녀는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컵을 든 손이 파르르 떨리며 뜨거운 커피가 손등 위로 쏟아졌다. 주변의 소음이 멀어지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직업으로서 수없이 마주했던 그 단어가, ‘언니’라는 이름 아래서는 이토록 무겁고 잔인한 것인 줄 처음 알았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비상계단으로 달려갔다.


그날 저녁, 장미의 집은 통곡의 공간으로 변했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자, 눈이 퉁퉁 부은 어머니가 와락 장미를 끌어안았다. 평생 강하기만 했던 아버지는 현관문 앞에 선 채, 딸의 얼굴을 차마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저 현관에 놓인 장미의 구두를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의 어깨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유진의 손에는 이미 암 관련 최신 정보가 인쇄된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생존율 통계, 최신 항암 치료 임상시험 결과, 부작용 사례 같은 차가운 데이터들이었다.


“엄마, 아빠, 일단 진정해. 언니, 조직 검사 결과지 봤어? 정확한 병기랑 종류를 알아야….”


유진은 애써 이성적인 간호사의 목소리를 냈지만, 시뻘겋게 충혈된 눈은 그녀의 절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 차가운 데이터들은 언니를 살리려는 절박한 사투였지만, 장미에게는 자신의 병이 얼마나 통계적이고 비정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잔인한 현실이었다. 장미는 문득 자신의 이 비극적인 상황을 디자이너의 눈으로 관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감정의 과잉으로 조화가 깨진 공간. 어머니의 슬픔은 채도 높은 붉은색, 아버지의 침묵은 명도 낮은 회색, 그리고 그사이를 떠도는 유진의 불안은 형체를 알 수 없는 탁한 색.' 자신의 고통을 남의 디자인 시안처럼 냉정하게 분석하는 모습은, 그녀가 이 상황을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느끼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민준은 그 모든 풍경의 마지막 조각처럼 퇴근 후 집에 들어섰다. 그는 거실의 처참한 분위기에 얼굴이 굳어졌다. 장미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겨우 사실을 털어놓았다. 민준은 충격받은 얼굴로 장미를 안아주었지만,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의 품은 놀라울 만큼 서늘했고, 심장은 멀게만 느껴졌다. 잠시 후 가족들이 돌아가고, 둘만 남은 거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장미는 그의 위로를 기다렸다. ‘함께 이겨내자’는 따뜻한 말을. 하지만 그는 소파 주위를 서성이며 전혀 다른 종류의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치료는 어떻게 된대? 당신 실비 보험 한도는 얼마였지? 치료비 외에 간병비도 생각해야 할 텐데… 회사는… 당분간 쉬어야 하나?”


그의 목소리에는 위로가 아닌, 혼란과 두려움, 그리고 너무나 현실적인 걱정이 담겨 있었다. 주먹을 쥐었다 펴는 그의 손이 장미의 눈에 들어왔다. 그날 밤, 장미는 민준의 등 뒤에서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꼈다.


며칠 후, 입원 수속을 위해 찾은 병원은 거대한 기계처럼 느껴졌다. 장미는 서류에 인적 사항을 적고, 병실 번호를 배정받고, 자신의 옷을 벗어 사물함에 넣었다. '디자이너 김장미'의 이름과 옷 대신, 그녀에게는 환자 번호와 헐렁한 환자복이 주어졌다. 손목에 식별띠가 채워지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이름과 직업, 취향을 모두 빼앗기고 라벨이 붙은 상품이 된 듯한 모멸감을 느꼈다.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첫 번째 의식이었다.


수술 동의서에 보호자 서명이 필요했다. 민준은 '사망 혹은 심각한 후유증이 발생할 수 있음'이라는 문구 앞에서 펜을 든 채 망설였다. 유독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에 순간 속이 울렁거렸다. 그 문구를 보는 순간, 그의 눈앞에 어린 시절 자신이 서 있던 병원 복도의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지금과 똑같은 소독약 냄새, 똑같이 차가웠던 보호자 대기실 의자의 감촉, 그리고 어머니의 병실 문 앞에서 들었던 의사의 나직하고 절망적인 목소리. 그는 떨리는 손으로 겨우 서명을 마친 뒤, 장미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나…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가볼게.”


그의 거짓말은 너무나 서툴렀다. 그가 병실에 머무는 동안에도 그는 창가에 멀찍이 서 있었고, 장미가 내민 손을 "아, 손에 땀이 나서…"라며 슬쩍 피했다. 그의 무의식적인 접촉 회피는 그 어떤 말보다 더 선명하게 그의 두려움을 보여주었다.


그날 오후, 장미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 디자이너인 서윤이 병실을 찾았다. 그녀는 최신 디자인 잡지와 타블렛을 들고 와서는 침대 옆 의자에 아무렇지 않게 주저앉았다.


“꼴이 이게 뭐냐. 그래도 안색은 괜찮네. 너 아프다고 봐주는 거 없어, 다음 시즌 프로젝트 아이디어는 내놔야지? 참, 박팀장 이번에 또 사고 친 거 들었어?”


서윤은 장미를 '환자'가 아닌 '김장미'로 대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짓궂은 농담과 업계 가십은 잠시나마 장미에게 숨통을 트여주었다. 하지만 그 유쾌함이 떠나고 난 뒤, 민준의 빈자리는 더욱 차갑고 황량하게 느껴졌다.


창가 침대에는 늘 창밖만 보는 젊은 환자, 현우가 있었다. 장미가 입원 첫날, 창밖을 보며 애써 "그래도 하늘은 파랗네…" 하고 중얼거렸을 때, 그가 무심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파란색, 며칠이나 갈 것 같아요? 희망 같은 거, 다 사치예요. 여긴 그런 거 가장 먼저 버리는 곳이니까.”

장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이 겨울의 시작이 단순한 질병의 고통뿐 아니라, 사랑과 우정, 그리고 믿음의 이름으로 숨겨진 거대한 배신의 서막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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