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를 하오 Part1

다시 피어나는 장미

by sarihana

제1부. 검은 점 하나

제1장. 회색 세상


다음 날, 장미는 예약 시간에 맞춰 종합병원을 찾았다. 어제까지 완벽한 황금비율로 디자인되었던 삶은 마치 다른 사람의 포트폴리오를 훔쳐본 것처럼 아득했고, 발목에 보이지 않는 모래주머니를 단 듯 걸음이 무거웠다. 병원 로비의 회전문을 통과하는 순간, 소독약과 방향제, 그리고 이름 모를 병자들의 한숨이 뒤섞인 공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피부에 막을 씌우는 듯한 그 공기는, 바깥세상과 이곳을 가르는 투명하고도 절대적인 벽처럼 느껴졌다.


접수를 하고 산부인과 외래 병동 대기실 의자에 앉았을 때, 그녀는 자신이 거대한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의 냉기가 스며들었고, 신경질적인 형광등 불빛 아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떠다녔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침묵의 섬들. 그 비대칭적이고 부조화스러운 풍경 속에서, 잔뜩 부른 배를 성모 마리아처럼 경건하게 쓰다듬는 예비 엄마의 얼굴에는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했고, 아내의 손을 초조하게 주무르는 남편의 눈빛에는 자신이 대신 아파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 서려 있었다. 세월의 모든 풍파를 겪어낸 듯 무표정한 노부인은, 어쩌면 모든 것을 체념한 채 그저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미는 애써 그들의 시선을 외면하며 태블릿을 꺼냈다. 어제 밤늦게까지 공들여 마무리한 기획안의 선명한 색감과 정교한 레이아웃이 화면에 떠올랐다. 하지만 활자들은 의미를 잃고 흩어졌고, 아름다운 색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속으로 선을 그었다. ‘저들은 환자, 나는 방문객. 저들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달라.’ 자신은 그저 삶에 찍힌 작은 점 하나를 확인하러 온, 아직은 건강하고 평범한 사람이라고. ‘별일 아닐 거야.’ 그 주문은 그러나, 쿵, 쿵, 갈비뼈를 때리는 심장 소리에 묻혀 희미해져 갔다.


“김장미 님, 들어오세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멎었다. 장미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마치 사형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처럼 진료실로 향했다.


산부인과 교수는 평소의 인자한 미소 없이, 심각한 얼굴로 모니터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침묵은 그 어떤 말보다도 무거웠다. 벽에 걸린 수많은 의학 학위증들은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쓰인 비문(碑文)처럼 보였고, 책상 위에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는 그녀가 앞으로 짊어져야 할 고통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책상 한편에 놓인 교수의 가족사진 속,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잔인할 정도로 평화로워 보였다.


“앉으세요.”


그의 낮은 목소리에 장미는 기계적으로 자리에 앉았다. 교수는 한참 동안이나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망설였다. 컴퓨터 팬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음, 벽시계의 초침이 절그럭거리며 넘어가는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마침내 그가 마우스를 움직여 모니터 화면에 영상 하나를 띄웠다. 그녀의 몸속 가장 은밀한 곳을 찍은, 차갑고 생경한 흑백의 이미지였다.


“여기… 이 부분입니다.”


그가 가리킨 곳에, 전에 보았던 그 희미한 얼룩이 훨씬 더 선명하고 불길한 형태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완벽했던 삶이라는 새하얀 캔버스 위에, 누군가 악의적으로 찍어놓은 검은 잉크 방울처럼.


“수술이 필요한가요? 간단한 시술이면…”


장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갈라졌다. 교수는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고, 피로와 연민이 뒤섞인 눈으로 장미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 찰나의 순간, 그녀의 눈에 교수의 넥타이에 묻은 아주 작은 김칫 국물 자국이 들어왔다. 저토록 평범한 일상의 흔적. 그리고 아주 어렵게, 하지만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암입니다.”


그 한마디가 총성처럼 진료실의 공기를 찢었다.


순간, 세상의 모든 채도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명도와 대비 값만 남은 흑백의 세상 속에서, 오직 의사가 가리킨 모니터 속 검은 점만이 가장 선명한 'K값 100%'의 절대적인 검정으로 존재했다. 귀에서는 이명이 윙윙거렸고, 교수의 입은 계속 움직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모든 것이 느리고 불분명해졌다. 이건 내가 아니야. 내 삶의 이야기가 아니야. 우리 지혜는 아직 너무 어린데. 민준 씨는 어떡하지.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수만 개의 질문이 머릿속에서 뒤엉켰지만, 그 어떤 것도 문장이 되지 못했다. 진료실 의자의 차가운 쇠 팔걸이를 손톱이 하얗게 되도록 꽉 쥐었다. 그 차가운 감촉만이, 이 끔찍한 현실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였다.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병원 주차장, 자신의 차에 앉아 한참 동안이나 시동을 걸지 못했다. 오후의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졌지만, 그녀의 세상은 여전히 회색이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아이돌의 노래는 다른 주파수의 세상에서 들려오는 신호처럼 멀게만 느껴졌고, 주차장 저편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웃으며 걸어가는 젊은 부부의 모습은 비현실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 모든 평범한 풍경들이 그녀의 고립감을 더욱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핸들에 이마를 기댄 채, 마비된 슬픔 속에서 시간을 잊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진단실의 그 검은 점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는 얼룩이 되어 그녀의 모든 관계와 미래를 집어삼킬 듯한 공포로 다가왔다.


그때, 휴대폰이 징, 하고 짧게 울렸다. 어둠 속에서 던져진 유일한 구명줄처럼, 그녀는 허겁지겁 휴대폰을 들었다. 민준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진료 끝났어? 저녁 뭐 먹을까?]


평범한 일상이 담긴 그 다정한 문자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칼날이 되어 심장을 꿰뚫었다. 그녀는 답장을 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의 다정함이 아팠다. 어젯밤, 나를 감싸 안았던 그의 팔에서 느껴졌던 그 미세한 긴장감의 이유가, 어쩌면 이것이었을까 하는 잔인한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간은 이미, 저 메시지가 온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다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그 따뜻한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한 이방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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