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어나는 장미
항암 치료가 시작되던 날, 장미는 동생 유진의 부축을 받으며 화학요법실로 들어섰다. 창가로 여러 개의 안락의자가 줄지어 있었고,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환자들이 링거대에 매달린 채 조용히 약물을 맞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기계음, 소독약과 알코올 솜이 뒤섞인 냄새, 나직한 대화 소리. 그곳은 출구 없는 절망의 굴, 터널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이었다.
“많이 긴장되시죠? 첫 번째가 제일 그래요.”
담당 간호사가 능숙하지만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며 굵은 주삿바늘을 그녀의 팔에 꽂았다. 혈관을 타고 전해지는 차가운 감각에 장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곧이어 간호사는 섬뜩할 정도로 선명한 붉은색 약물이 담긴 수액 백을 가져와 링거대에 걸었다. 환자들 사이에서 ‘붉은 악마’라 불리는 독한 항암제였다. 독으로 독을 잡는다는 그 붉은 액체가, 투명한 튜브를 타고 한 방울씩, 천천히 그녀의 혈관으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장미는 눈을 감고 상상했다. 저 붉은 독이 내 몸의 모든 세포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모습을. 이 붉은 독이, 내 몸을 살릴 수 있을까. 아니면 먼저 나를 죽일까.
첫 치료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 몇 시간 동안은 아무렇지 않았다. 어쩌면 견딜만할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이 피어오르던 순간, 갑자기 속이 뒤집히는 격렬한 구역질이 덮쳐왔다. 장미는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붙잡았다. 위액까지 모두 토해내고, 온몸의 힘이 빠져 차가운 타일 바닥에 주저앉았다. 몸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통제 불능의 존재가 되어버린 굴욕감에 눈물이 흘렀다.
세상은 온통 명도와 채도가 낮은 무채색의 공간이 되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어머니의 정성 어린 음식조차 혀에 닿는 순간 역한 쇠 맛으로 변했다. 아름다운 색감의 조화가 무너지고, 모든 맛이 부식된 쇠처럼 변해버리는 감각. 미각을 잃는다는 것은 디자이너인 그녀에게 삶의 가장 큰 즐거움과 영감을 잃는 것이었다. 디자인 잡지를 펼쳐도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흩어졌다. 아이디어를 떠올리려 해도 머릿속은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기만 했다. ‘켐브레인’이라는 후유증이었다. 마치 머릿속의 포토샵 프로그램이 고장 나, 모든 기능이 비활성화된 것처럼 느껴졌다. 디자이너로서 가장 예리했던 감각과 사고가 무뎌지는 것은, 죽음만큼이나 두려운 일이었다.
고통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마저 갉아먹었다. 속이 뒤집히는 구역질을 참으며 어린 딸 지혜의 저녁밥을 차려줘야 했다. 음식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엄마, 배고파!”
딸의 해맑은 목소리가 그날따라 원망스러웠다. 사랑스러운 딸의 존재가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 그녀는 스스로가 끔찍하게 미웠다.
어느 날, 어머니가 귀한 전복을 구해 밤새 푹 고았다며 전복죽을 쑤어 왔다. 한 숟갈이라도 먹이고 싶은 엄마의 간절한 마음을 알았지만, 입안에 퍼지는 쇠 맛에 장미는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그만 좀 해! 먹기 싫다고!”
상처받은 어머니의 얼굴을 본 순간 후회가 밀려왔지만, 사과할 기력조차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병마가 주는 고통만큼이나 그녀를 병들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뜬 장미는 베갯잇 위에 수북이 쌓인 자신의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쓸었고, 머리카락은 힘없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보았다. 풍성하고 윤기 나던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고, 군데군데 땜질한 것처럼 휑하게 드러난 두피. 그 낯선 모습에 숨이 턱 막혔다.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던 마지막 조각마저, 그렇게 힘없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 유진이 병실을 찾았다. 장미는 아무 말 없이 모자를 벗었다. 그 처참한 모습을 본 유진은 말없이 장미를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작은 이발기를 꺼냈다.
“언니, 내가 밀어줄게. 괴물처럼 빠지게 두는 것보다, 우리가 먼저 보내주자.”
유진의 손에 들린 이발기가 위잉, 하고 낮게 울었다. 거울 속에서, 남은 머리카락이 힘없이 잘려나가고, 마침내 완전히 낯선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두 자매는 부서진 조각 같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소리 없이 울었다. 며칠 뒤, 병실을 찾은 딸 지혜가 물었다.
“엄마, 왜 계속 모자 써? 답답하지 않아?”
장미는 차마 모자를 벗지 못하고 딸을 억지로 끌어안았다. 터널의 가장 깊은 곳, 이제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 그녀는 완전히 홀로 갇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