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 움 Part2

나는 유령이었다.

by sarihana

2장. 하얀 지옥의 입구


옥상에서의 맹세는 잠시나마 우리에게 용기를 주었다. 하지만 병동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춰 서고, "띵" 하는 소리가 마치 마지막 선고처럼 울리며 문이 열리는 순간, 밖에서 불어오던 상쾌한 바다 내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세상과 우리 사이에 거대한 유리벽이 세워지는 듯했다.


가장 먼저 우리를 덮친 것은 냄새였다.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옥상에서 우리가 가졌던 모든 희망과 맹세를 지워버리려는 듯 공격적으로 밀려왔고, 그 뒤로는 식어버린 혈액의 비릿함과 오래된 공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눅눅한 곰팡내가 뒤섞여 숨을 막히게 했다.


눈앞에 펼쳐진 복도는 끝을 알 수 없는 미로처럼 길고 차가웠다. 천장의 낡은 형광등은 신경질적으로 윙윙거리며 위태롭게 깜박였고, 그 빛 아래 수많은 카트 바퀴 자국과 소독약 얼룩들이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갓 왁스칠한 바닥은 우리의 모습을 일그러뜨려 비추었다. 길게 늘어지고 뒤틀린 그림자. 우리는 이미 이 공간에 속한 존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때, 우리 옆으로 환자 침대 하나가 소리 없이 스쳐 지나갔다. 새하얀 시트 위, 창백하게 질린 앳된 얼굴이 무감각하게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와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눈동자. 나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고통의 교향곡이 들려왔다. 심장 박동을 알리는 기계의 단조로운 '삐-, 삐-' 소리가 이 지옥의 무심한 심장 박동처럼 뇌 속으로 파고들었고, 그 위로 어딘가에서 터져 나오는 날카로운 호출 벨 소리, 병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누군가의 낮은 신음, 그리고 마침내 복도 저편 스테이션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짧은 고함이 겹쳐졌다.


"이게 보고서야, 쓰레기야! 내가 몇 번을 말했어? 환자 상태를 이렇게 대충 파악하고 있으면 어떡해! 너, 내가 하라는 대로 안 했지?"


그 폭언은 마치 우리를 향한 예고편 같았다. 나와 수현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구석으로 물러섰다.


스테이션은 차트와 모니터,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기로 둘러싸인 혼돈의 요새 같았다. 선배 간호사들은 그 안에서 자신들만의 단단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는 것을 힐끗 본 한 선배가 들으라는 듯 말했다. "올해 신입들은 제발 좀 빠릿빠릿해야 할 텐데. 오늘도 늦으면 진짜 끝이야." 그 한마디에 주변의 모든 시선이 잠시 우리에게 머물렀다가, 이내 아무 관심 없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그곳에는 무언의 규칙이 지배하고 있었다. 연차가 가장 낮은 간호사가 모두의 커피를 타는 동안, 다른 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만 아는 의학 용어와 별명을 섞어 대화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는 유머가 아닌, 서열을 확인하는 날카로움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그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바로 그때, 복도 끝 휴게실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소리가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감정 없는 앵커의 목소리가 병동의 단조로운 기계음 위로 겹쳐졌다. 생명을 알리는 '삐-' 소리와 죽음을 전하는 목소리가 기이한 불협화음을 이루며 우리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오늘 새벽,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던 20대 간호사가 병원 기숙사에서…"


TV 화면 하단으로 흘러가는 붉은색 속보 자막이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것은 먼 나라의 비극이 아니었다. 나는 수현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그녀는 TV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 고개를 숙였지만, 땀에 젖은 손바닥을 계속해서 바지춤에 비벼대고 있었다.


신규 간호사들이 모인 회의실, 문이 닫히자 세상과 완벽히 단절된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수간호사를 기다리는 동안, 동기들 사이에서 불안한 속삭임이 오갔다. "들었어? 지난 기수 신입, 수간호사님한테 잘못 걸려서 한 달 만에 그만뒀대.", "쳐다보기만 해도 사람이 얼어붙는대." 그 소문은 우리의 공포를 더욱 증폭시켰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하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3초간의 정적이 우리의 숨을 멎게 했다. 이윽고 딱, 딱, 딱. 바닥을 울리는 규칙적인 구두 소리와 함께 수간호사가 들어서는 순간, 회의실의 모든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녀는 얼음장 같은 눈으로 우리 한 명 한 명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마치 가치를 매기는 듯한 그 시선 앞에서 우리는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그녀가 우리 앞을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잠깐의 침묵 속에서 모두의 목에 걸린 청진기 끝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집단적 공포가 회의실의 산소를 모두 태워버리는 듯했다.


그녀는 탁자에 놓인 펜을 집어 들고는 우리를 향해 내리꽂듯이 말했다. "오늘부터 너희는 학생이 아닌 간호사다. 명심해라. 이곳에서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우리 병동은 인력이 빠듯해. 한 사람이 제몫을 못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동료들에게 돌아간다. 너희의 작은 실수가 환자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다는 걸 잊는 순간, 너희는 살인자와 다를 바 없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얼음송곳처럼 회의실의 공기를 꿰뚫고 박혔다. '살인자'. 그 단어가 내 귀에 낙인처럼 새겨졌다. 내 머릿속에 아기의 힘찬 심장 박동 소리와, 어머니의 손을 잡던 따뜻한 간호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모든 숭고한 이미지 위로 '살인자'라는 검은 낙인이 찍혔다. 나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이곳은, 그 꿈의 첫 페이지에 살인자라는 낙인을 찍어버렸다. 구원과 살인이 이토록 얇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나는 이 지옥에 들어선 첫날부터 온몸으로 깨달아야만 했다.


서늘한 경고에 등골이 오싹했다. 테이블 밑으로, 나는 수현의 손을 몰래 꽉 잡았다. 수현의 손 역시 차갑게 젖어 있었고, 긴장에서 배어 나온 축축한 땀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쥐며 속삭였다. "괜찮아. 우리에겐 서로가 있잖아."


하지만 그 말을 뱉는 내 목소리마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과연 수현의 두려움을 덜어줄 자격이 있는 걸까. 어쩌면 나는, 그녀의 공포 위에 나의 공포를 얹어 함께 가라앉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음속에서 처음으로, 아주 작은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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