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 움 Part1

나는 유령이었다.

by sarihana

1부. 함께 꾼 꿈, 그리고 균열

1장. 꿈의 무게


새벽 4시 30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잠든 시간, 날카로운 알람 소리가 고요를 찢었다. 낡은 자취방의 공기는 서늘했고, 밤새 열어둔 창문 틈으로 빗물에 젖은 아스팔트 냄새가 도시의 지친 숨결처럼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어둠 속에서 낡은 전기난로가 내뿜는 붉은빛만이 외롭게 깜박였다. 그 빛은 마치 첫 출근을 앞둔 내 작은 심장처럼, 설렘과 불안으로 가쁘게 뛰고 있었다.


방 안은 우리의 꿈과 역사로 가득했다. 책상 위에는 포스트잇으로 빼곡하게 붙여놓은 약물 이름들과 서로를 응원하는 낙서들이, 한쪽 벽에는 '우리가 꿈꾸는 간호사 10계명'이라는 서툰 글씨가 붙어 있었다. 이 작은 둥지에서, 우리는 수많은 밤을 새우며 이 날을 준비해왔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어젯밤 의자 위에 신주 모시듯 걸어둔 보라색 유니폼을 집어 들었다. 다시 한번 다리미의 전원을 켰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증기가 뿜어져 나오자, 나는 혹시라도 남아있을지 모를 작은 구김 하나까지 정성 들여 펴냈다.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내 실수 하나로 사람이 잘못되면 어떡하지? 나는 엄마인데, 약해지면 안 돼.' 이것은 단순한 다림질이 아니었다. 내 안의 불안과 두려움까지 뜨거운 증기로 함께 눌러 펴내며, 요동치는 불안감을 잠재우는 나만의 조용한 의식이었다.


유니폼을 갈아입고 부엌으로 향했다. 따뜻한 밥 위에 정갈하게 올린 계란말이와 멸치볶음. 나와 수현, 두 사람 몫의 도시락을 싸는 내 손길은 신중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버틸 힘을 주렴.' 간절한 주문과도 같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는 아직 꿈속을 헤매는 수현을 흔들어 깨웠다. "수현아, 일어날 시간이야. 우리 첫 출근이잖아." 잠결에 뒤척이던 그녀가 눈을 뜨고, 우리는 마침내 나란히 낡은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아직 배우지 못한 어른의 역할을 연기하려는 아이들처럼, 우리는 서로를 어색하게 바라보다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눈물겹도록 위태로웠다.


"야, 이희진. 우리 진짜 간호사 된 거 맞지? 꿈 아니지?"


"그러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너 어깨 각진 것 좀 봐. 군인인 줄."


수현이 내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걱정 마, 넌 최고의 간호사가 될 거야. 우리가 서로의 첫 번째 환자가 되어주기로 했잖아!" 그녀의 장난스러운 말에 나의 긴장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거울 속 우리는 아직 앳된 얼굴이었지만, 그 위에 덧입혀진 보라색 유니폼은 낯선 어른의 옷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우리에게 그것은 단순한 옷이 아니었다. 지긋지긋했던 입시와 고된 실습,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함께 견뎌낸 우리들의 맹세이자 약속의 증표였다. 가슴에 달린 내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명찰은, 꿈의 증거인 동시에 앞으로 짊어져야 할 생명의 무게를 실감케 하는 차가운 족쇄 같았다.


그날의 다짐은 십 년 전, 절망으로 가득했던 중환자실에서 시작되었다.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그 밤, 교복을 입은 수현이 다가와 따뜻한 캔커피를 쥐여주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차가운 손을 감싸주었다. 그 절망 속에서, 한 간호사 선생님은 기술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우리 곁을 지켰다. 그녀는 따뜻한 손으로 어머니의 부은 발을 주무르며 내 세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주었다.


"어머니께서 가장 보고 싶은 건, 따님 얼굴일 거예요."


그 한마디에 나는 일어설 수 있었다. 나도 누군가의 가장 약한 순간에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수현에게 털어놓았을 때, 그녀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같이 하자. 같이 그런 간호사가 되자."


그 맹세는 간호대학 첫 실습 날, 더욱 단단해졌다. 산부인과 병동, 두려움에 떨며 처음으로 청진기를 귀에 꽂았을 때였다. 산모의 배 위로 차가운 청진기를 가져다 댄 순간, 내 귀로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근, 두-근. 작지만 우렁찬, 생명의 소리. 그 강렬한 울림에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옆에서 지켜보던 수현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우리는 그날 처음으로 생명의 무게를 느꼈고, 이 길을 함께 걷기로 한 우리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엄마, 저랑 희진이 다녀오겠습니다!"


수현이 현관문 앞에서 씩씩하게 외쳤다. 수현의 어머니는 우리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씀하셨다. "우리 딸들, 장하다! 이제 고생 끝이고 안정적인 미래만 남았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밥 거르지 말고, 알았지?" 그 따뜻한 염려 속에 담긴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어머니는 우리가 들어갈 세상이 어떤 곳인지 정말 알고 계실까.' 나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질문을 삼켰다.


이른 새벽의 버스는 한산했다. 창밖으로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회색빛 도시가 스쳐 지나갔다. 버스 안에는 우리처럼 이른 새벽 일터로 향하는, 지친 표정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무표정하고 고단한 얼굴들과, 희망으로 반짝이는 우리의 얼굴은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조금 전, 아이가 나를 불렀던 '슈퍼 히어로'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이에게 나는 아픈 사람을 구해주는 영웅이었다. 하지만 나는 영웅이 될 수 있을까. 정맥주사 하나 제대로 놓지 못할까 봐, 수많은 약물 이름을 헷갈릴까 봐 두려움에 떠는 겁쟁이 신입일 뿐인데. 아이의 순수한 믿음의 무게가, 내 어깨 위 낡은 가방보다, 내 자신의 꿈보다 훨씬 더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잘 해내야만 한다. 나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내 아이를 위해서, 그리고 불안한 눈으로 창밖을 보고 있는 내 친구 수현을 위해서라도. 나는 강해져야만 한다.


버스 앞쪽 모니터에서 아침 뉴스가 무심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질적인 간호 인력 부족, 신규 간호사 1년 내 퇴사율 역대 최고] 라는 자막이 스치는 순간, 수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손이 무릎 위에서 희미하게 떨렸다. 나는 애써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걱정 마. 우린 다를 거야, 그렇지? 서로가 있잖아." 수현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미소는 유리창에 금이 간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병원 옥상에 올라선 우리는 잠시 숨을 골랐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 병원 건물들이 거대한 하얀 성채들처럼 묵묵히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차갑고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부산의 아침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희미한 소금 냄새와 도시의 소음이 섞여 있었다.


"희진아, 나 사실 좀 무서워.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책에서 본 거랑은 완전히 다르겠지? 만약에… 만약에 나 때문에 환자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해?"


수현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나는 그런 수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 우리 옆엔 서로가 있잖아."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나 자신에게 주문을 외웠다. '우리에겐 서로가 있다.' 이 거대한 하얀 성채 앞에서, 우리가 가진 무기라고는 고작 이 작고 연약한 우정뿐이었다. 제발, 이 방패가 부서지지 않기를. 우리가, 부서지지 않기를.


그때 수현이 주머니에서 똑같이 생긴 볼펜 두 자루를 꺼냈다.


"희진아, 내가 우리 선물 샀어. 우리 이걸로 첫 차팅을 하는 거야.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하루에 하나씩은 꼭 이걸로 좋은 일을 기록하자. 우리가 왜 간호사가 되기로 했는지 잊지 않게."


우리는 자판기에서 뽑은 뜨거운 캔커피를 부딪혔다. '쨍' 하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그리고 우리는 약속의 증표인 볼펜을 마주 들고 '딸깍' 소리를 냈다. 그 작은 소리가, 우리의 가장 단단한 맹세였다. 하지만 그 뒤로, 항구를 떠나는 배의 낮고 긴 뱃고동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작은 맹세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거대한 세상이 내쉬는 무심한 한숨 소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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