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블루스 1편 - Part9

1억 5천만원의 무게

by sarihana

9장. 판도라의 상자


막다른 골목의 차가운 시멘트 벽에 기댄 윤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우가 붙잡은 팔에서 더 이상 저항할 힘조차 없는 듯했다. 그의 눈빛은 도망치고 싶어 하는 짐승의 그것이었다.


"지우야, 제발… 그냥 나 좀 내버려 둬. 넌 아무것도 몰라."


"모르니까 알려달라는 거잖아요! 사람이 죽었어요, 선배. 선배가 소개해준 그 집 때문에!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


지우의 절규에 윤호는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그의 눈은 감겨 있었지만, 수많은 얼굴들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억울함에 일그러진 피해자들의 얼굴, 그리고 이제는 세상에 없는 '햇살가득'의 공허한 눈빛이 그의 목을 죄어왔다. 마지막으로, 병상에 누워 그를 애틋하게 바라보던 어머니의 희미한 미소까지. 이 모든 죄책감이 그의 굳게 다문 입술을 미세하게 떨게 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따라와."


윤호는 지우를 데리고 폐허나 다름없는 자신의 옛 사무실로 향했다. 코를 찌르는 곰팡내 속에서 윤호는 힘없이 웃었다. 그 웃음은 세상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공허했다.


"꼴 좋지? 나도 처음엔 너처럼 평범한 꿈을 꿨어. 번듯한 사무실 차려서 돈 버는 거. 근데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


그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의자에

주저앉았다.


"나도 대출을 갚지 못해 벼랑 끝에 몰렸거든. 아픈 어머니 병원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사채 빚은 숨통을 조여왔어. 집값은 미친 듯이 오르는데, 나 같은 놈들은 어차피 평생 발버둥 쳐도 안 된다는 절망감… 그때 그들이 기회를 주더군. 단 한 번에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달콤한 속삭임."


윤호는 텅 빈 눈으로 지우를 바라보며, 마치 강의하듯 냉소적인 목소리로 사기의 전모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 바닥 선수들은 이걸 '작업'이라고 불러. 네가 당한 건 그중에서도 가장 고전적인 '깡통전세' 작업이야. 아주 완벽하게 설계됐지."


지우는 숨을 죽였다. 윤호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비수처럼 박혔다.


"우선 '미끼'를 준비해. 네가 계약한 그 신축빌라, 그거 시세가 불분명하지? 실제 가치는 2억도 안 돼. 근데 조직이 건축주랑 짜고 매매가를 2억 5천으로 부풀려서 사들여. 그리고 네 전세금을 정확히 2억 5천에 맞춘 거야. 이게 매매가랑 전세가를 똑같이 맞추는 전형적인 수법이야. 자기 돈 한 푼 안 들이고 집을 사는 거지. 네 돈으로."


"내 돈으로… 집을 샀다고요?" 지우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렸다.


"그래. 그리고 집주인 '김민철'? 그 사람 본 적 있어? 그냥 이름만 빌려준 '바지사장'이야. 신용불량자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노숙인일 수도 있고. 네 보증금 2억 5천이 그 사람 계좌로 들어오자마자, 나 같은 중개사 수수료, 바지사장 수고비 떼고 전부 조직의 총책한테 넘어갔어. 애초에 네게 돌려줄 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거야."


윤호는 잠시 말을 끊고 지우의 얼굴을 살폈다. 지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그 집에 은행 대출, 즉 '선순위 근저당'이 5천만 원 있었지? 내가 잔금 치르는 날 바로 갚는다고 특약에 써줬잖아. '걱정 마, 지우야.' 하면서."


윤호는 스스로를 비웃듯 말했다.


"그럴 돈이 애초에 없었어. 이제 그 집은 빚만 3억이야. 2억짜리 집에. 나중에 경매로 넘어가면, 법적으로 순서가 앞서는 은행이 5천만 원을 먼저 가져가. 그럼 넌 남은 돈에서 운 좋아야 1억 5천 건지는 거고. 이게 네가 당한 사기의 전부야. 간단하지?"


지우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인생을 건 희망이, 윤호의 입에서는 너무나 간단하고 체계적인 '작업'일 뿐이었다.


윤호는 먼지 쌓인 서류 더미 속에서 낡은 외장하드 하나를 꺼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짓 해서 번 돈으로 보내드린 병원비가… 독약 같았다. 어머니 얼굴 뵐 면목이 없어."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게 내가 그동안 모아둔 자료들이야. 조직의 모든 것이 담겨 있어. 이걸로 그들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걸 네게 주는 순간, 나도 끝이야. 그들이 나를 노릴 거고, 내 가족에게도 위험이 미칠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는 지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런데도, 더 이상은 못 하겠어. 매일 밤 죽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라… 내 안의 양심이 소리치고 있거든. 난 이제… 너처럼 살고 싶어."


윤호는 외장하드를 지우의 손에 쥐여주었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 그것은 단순히 디지털 데이터 덩어리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맞바꾼 위험한 진실이자, 한 인간의 마지막 남은 양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