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블루스 1편 - Part11

1억 5천만원의 무게

by sarihana

11장. 태풍의 눈


그날 밤, KCIJ 탐사보도팀의 박진영 기자는 마감의 피로에 절어 있었다. 켜켜이 쌓인 서류 더미와 식어빠진 커피 향이 그의 사무실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몇 달째 거대한 유령과 싸우는 중이었다. 수도권 외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신축빌라 전세 사기. 수십 명의 피해자를 만났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바지사장'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힘없이 부서졌다. 배후를 가리키는 물증이 없으니, 경찰과 검찰은 미온적인 태도만을 반복했다. '또 하나의 안타까운 서민들의 비극.' 데스크에서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며 취재 중단을 압박해왔다. 5년 전, 비슷한 금융 사기 사건의 배후를 놓쳐 평범한 사람들이 피눈물 흘리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때, 개인 휴대폰으로 모르는 번호의 문자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박진영 기자님. '청춘 빌라' 전세 사기 피해자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부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부 자료'. 수많은 제보 속에서 섞여 들어오는,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품은 단어였다. 또 다른 음모론이거나, 혹은 절박한 피해자의 하소연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놓쳐버린 과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0.1%의 가능성에 기대어 답장을 보냈다. [오늘 밤 11시. OO 공원 벤치.]


약속 장소에 나갔을 때, 그곳에는 세상 모든 두려움을 짊어진 얼굴의 앳된 청년 두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우와 하준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절박했다. 박 기자는 직감했다. 이들은 그냥 피해자가 아니다. 이들은 폭풍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기자님을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박 기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라도 그럴 겁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으니까. 하지만 난 이 사건 끝을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뭘 가지고 있죠?"


지우는 망설임 끝에 외장하드를 꺼내 노트북으로 일부 파일을 열어 보여주었다. 박 기자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변했다. 암호화된 코드, 수많은 차명계좌, 그리고 피해자들을 분석한 잔인한 메모들. 그가 몇 달 동안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설계도'의 일부였다.


자료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온 박 기자는 디지털 포렌식팀의 후배와 함께 밤을 새워 외장하드를 분석했다. 수만 개의 파일은 거대한 미로였지만, 그들은 지치지 않고 길을 찾았다. 그리고 몇 시간의 사투 끝에, 후배가 암호화된 장부 하나를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안의 한 단어를 발견하는 순간, 박 기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유성개발'.


그것은 그가 전세 사기와는 별개로, 여당의 실세인 권 의원의 비자금을 추적하며 찾아낸 페이퍼컴퍼니의 이름이었다.


"...미쳤군."


그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건 단순한 전세 사기 조직이 아니었다. 정치권의 검은 돈을 세탁하고, 그 과정에서 서민들의 피 같은 보증금을 연료로 삼아 태워버리는 거대한 악의 시스템이었다. 지우라는 청년이 가져온 것은 단순한 증거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연결할,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마지막 열쇠였다.


다음 날 아침, 편집국은 벌집을 쑤신 듯했다. 박 기자는 팀장에게 모든 것을 보고했다. 팀장은 침을 삼켰다. "박 기자, 이거 잘못 건드리면 우리 회사 문 닫을 수도 있어. 정말 확실한가?"


그때, 편집국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권 의원 측의 보좌관이 '정중하게' 안부를 물어왔다는, 사실상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박 기자의 눈은 이미 불타고 있었다.


"팀장님, 5년 전 우리가 놓쳤던 그 사건 기억하십니까? 그때 우리가 한 발 더 나아갔더라면, 수십 명의 인생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물러서면, 저 청년들과 '햇살가득' 같은 사람들은 또다시 세상에서 지워질 겁니다. 이게 우리가 기자가 된 이유 아닙니까."


그의 말에 팀장은 한참을 망설이다, 마침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데스크는 내가 막을 테니, 자네는 기사만 생각해. 제대로 된 걸로, 아무도 반박 못 할 걸로."


그날부터 며칠간, 박 기자는 세상과 단절되었다. 그는 '햇살가득'의 딸이 2층 침대를 갖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로 기사의 첫 문장을 시작했다. 그는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지 않았다. 수많은 지우들의 절규와, 윤호들의 비겁한 변명,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비웃는 거대한 그림자의 실체를 한 자 한 자 새겨 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사가 세상에 공개되었다.


[단독] 수백억 원대 '청춘 빌라' 전세 사기, 거물급 정치인 비자금 세탁 창구였나


기사는 단순한 '뉴스'가 아니었다. 그것은 박진영이라는 기자가, 그리고 이름 없는 피해자들이 세상의 거대한 악을 향해 날린 선전포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