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 5천만원의 무게
재판은 지리한 전쟁이었다. 시간은 피해자들의 편이 아니었다. 한 달, 두 달 재판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하나둘씩 지쳐갔다. 연대를 외치던 목소리들은 생계의 위협 앞에서 힘을 잃어갔다. 피해자 모임의 단톡방에는 '오늘도 대부업체에서 전화가 왔다', '결국 야간 알바를 시작했다'는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흩어져 갔다.
그러던 중, 재판의 향방을 결정지을 중요한 기일이 잡혔다. 윤호가 남긴 외장하드의 증거 능력을 두고 변호인 측이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법의 정의를 기대했던 피해자들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법정을 찾았다.
최 변호사는 여유로운 태도로 변론했다. 그의 얼굴에는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 외장하드는 공범 관계에 있던 피고인 윤호가 심리적으로 극히 불안정한 상태에서 임의로 제출한 '오염된 증거'입니다.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증거는 효력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의 논리는 냉철했고 빈틈이 없었다. 그는 거대한 시스템의 논리를 대변하며, 개인의 비극을 절차적 문제로 축소하고 있었다.
결국 재판장의 판결은 냉정했다.
'땅, 땅, 땅.'
판사의 의사봉 소리가 법정 안에 차갑게 울려 퍼졌다. "증거수집 절차의 적법성에 흠결이 있다는 변호인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핵심 파일 몇 개를 증거 목록에서 제외한다."
그 소리가 마치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피해자들 사이에서 억눌렸던 탄식이 터져 나왔다. 지우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합법적인 진실 은폐였다. 거대한 벽에 부딪힌 듯한 절망감이 다시 모두를 덮쳤다. 이로써 사기 조직의 몸통을 잡을 마지막 기회마저 사라져버렸다. 피해자들의 텅 빈 눈빛, 굳게 다문 입술은 마치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날 밤, 지우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책상 위에는 재판 자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길 수 없는 싸움, 뚫을 수 없는 벽 앞에 선 기분이었다. 그때, 솜이가 다가와 그의 품에 파고들며 가르릉거렸다. 그리고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발로 그의 가슴을 천천히, 반복해서 눌렀다. 그는 이 작은 생명체의 온기 속에서 간신히 무너지지 않고 버텼다. 솜이의 체온은 잃어버린 모든 것을 잠시 잊게 해주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는 솜이를 품에 안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불 꺼진 도시의 풍경은 그들의 절망처럼 어둡고 깊었다. 하지만 지우는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의 싸움은 이제, 법정이라는 차가운 공간을 넘어, 이 불합리한 세상 자체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무력한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운명에 처한 사람들의 마지막 희망을 지키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