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 5천만원의 무게
기재부 회의 이후, 나는 부처 내에서 유령 같은 존재가 되었다. 복도를 지나는 동료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고, 과장님은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내 '도심 상생주택' 보고서는 '위험하고 과격한 발상'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채 내부 결재망 어딘가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박성준 국장의 보이지 않는 힘이 부처 전체를 짓누르는 듯했다. 그는 단 한 번의 회의로, 나의 제안을 누구도 감히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금기어로 만들어 버렸다.
어느 날 오후, 과장님이 나를 조용히 탕비실로 불렀다. 그는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타서 건네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김 주무관, 자네 뜻 좋은 거 알아. 하지만 여긴 전쟁터야. 박 국장 같은 사람을 정면으로 들이받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고. 국장님도 지금 위에서 압박받고 계셔. 일단… 그냥 좀 숙이고 있게. 평소처럼 보고서 올리고, 조용히 지내다 보면 잠잠해질 거야.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그래야 해."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이 내게는 항복 선언처럼 들렸다.
'포기해야 하나.' 밤마다 그 생각이 나를 덮쳤다. 현실과 타협하고, 다시 예전처럼 영혼 없는 보고서를 찍어내는 부품으로 돌아가야 하나. 그것이 이 거대한 조직에서 살아남는 현명한 길일지도 몰랐다.
퇴근 후에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밤늦도록 서울의 거리를 헤맸다. 그러다 문득, 홀린 듯이 발길을 옮긴 곳은 신림동의 한 가파른 언덕길이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반지하 주택들이 곰팡이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동네. 어둠이 내린 골목은 음식물 쓰레기 냄새와 축축한 습기가 뒤섞여 숨을 막히게 했다. 골목 끝 전봇대에 위태롭게 매달린 가로등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대체 누구를 위해 이 일을 하는가?'
회의실의 논리와 숫자에 갇혀,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박 국장은 나에게 '도덕적 해이'를 말했지만, 이 골목의 현실은 '생존'이었다. 나는 휴가를 냈다. 그리고 며칠간, 회색 도시의 가장 깊고 낮은 곳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은 곰팡내 나는 반지하에 사는 신혼부부였다. 벽지는 축축한 습기에 울어 있었고, 방 한구석에는 제습기가 쉴 새 없이 소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아내가 만삭이었지만, 그들은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낡은 싱크대 위에는 아기 옷가지들이 정갈하게 널려 있었다. 남편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의 가장 큰 적은 햇빛이 아니라 보증금이에요. 몇백만 원만 더 있었으면 이 위층으로라도 올라갔을 텐데… 아이가 태어나면 이 냄새를 맡게 하고 싶지 않아요." 아내는 배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덧붙였다. "그래도 창문으로 저만큼이나마 하늘이 보여서 다행이에요." 그녀가 가리킨 창문은 사람들의 발목만 겨우 보이는, 세상과 연결된 유일한 통로였다.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노량진의 한 고시원이었다. 숨 막히게 좁은 복도를 따라 늘어선 문들. 그곳은 방이 아니라 관처럼 느껴졌다. 창문도 없는 2평 남짓한 공간, 등을 펴고 눕기조차 힘든 그곳에서 3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청년은, 나를 보자 쓴웃음을 지었다. "주무관님이세요? 행복주택이요? 그거 당첨되는 게 시험 합격보다 더 어려워요. 여긴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그냥 꿈을 담보로 하루하루 버티는 공간이죠." 그의 방에는 법전보다 부동산 앱 화면이 더 오래 켜져 있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가끔 그런 상상을 해요.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으로 햇빛을 보는 거요. 그게 제 유일한 사치예요."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젠트리피케이션의 광풍이 휩쓸고 간 성수동의 한 골목이었다. 40년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낡은 구둣방 할아버지는, 몇 달 뒤 가게를 비워줘야 한다고 했다. 새로 들어온 건물주는 보증금을 세 배나 올려달라고 했다. 가게 안은 짙은 가죽 냄새와 낡은 나무 냄새로 가득했다. 수십 년간 그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진 도구들이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동네가 좋아지는 건 좋은 일이지. 근데, 왜 우리는 쫓겨나야만 하는 건가? 이 동네의 역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만든 건데…." 그의 갈라진 손마디에는 수십 년의 세월과 함께, 자신이 가꾼 터전에서 밀려나는 자의 깊은 설움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그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찍고,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그것은 단순한 민원 청취가 아니었다. 숫자와 데이터로는 증명할 수 없는, 이 도시의 진짜 고통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눈을 감자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온몸으로 흡수한 도시의 슬픔이 납처럼 나를 짓눌렀다. 이 거대한 절망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을까. 포기하고 싶었다. 과장님의 말처럼, 조용히 엎드려 때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지도 몰랐다. 바로 그때, 나는 낡은 싱크대 위에 정갈하게 널려 있던 아기 옷가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고시원 청년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아침의 햇빛’을, 구둣방 할아버지의 갈라진 손마디를 떠올렸다. 그래,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표류하던 내 보고서를 다시 열었다. 그리고 가장 첫 페이지를 통째로 지워버렸다. 딱딱한 정책 개요와 기대 효과 대신,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보고서의 제목은 그대로였다. '공공 주도 도심 상생주택 공급 혁신 방안'. 하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첫 장에는 신림동 반지하 부부의 사진과 함께 그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이것은 단순한 주거 문제가 아니라, 미래 세대의 건강권과 행복추구권에 대한 문제입니다."
두 번째 장에는 고시원 청년의 인터뷰가 실렸다.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발 딛고 설 수 있는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입니다."
세 번째 장에는 쫓겨나는 구둣방 할아버지의 사진을 넣었다. "도시 개발은 숫자의 성장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역사를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나의 보고서는 더 이상 차가운 정책 제안서가 아니었다. 회색 도시의 가장 낮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아우성이자, 절박한 외침이었다. 박성준 국장의 논리를 반박하기 위한 데이터와 해외 사례는 부록으로 밀려났다. 본질은 바로 이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나는 수정된 보고서를 들고 다시 국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 내 등 뒤에는, 내가 만났던 수많은 도시의 목소리들이 함께 서 있었으니까. 이 싸움은, 더 이상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