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블루스 3편 - Part4

1억 5천만원의 무게

by sarihana

4장. 예산이라는 이름의 성벽


나의 새로운 보고서는 조용한 폭풍을 일으켰다. 딱딱한 정책 용어 대신, 살아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채워진 보고서는 이례적으로 내부 게시판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젊은 사무관들 사이에서 "드디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이야기하는 보고서가 나왔다"는 익명의 응원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오후, 메신저로 다른 과의 동기로부터 쪽지가 왔다. ‘현우야, 보고서 봤다. 속이 다 시원하더라. 너 혼자 아니니까 힘내라.’ 작지만 따뜻한 연대감이었다.


KCIJ 탐사보도팀의 박진영 기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국토부 내부에서 파격적인 주거 안정 대책이 논의 중이라는 데 사실입니까?"라고 물었다. 내 보고서가 바깥세상으로 흘러나갔다는 뜻이었다. 이전의 냉소와 무관심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결국 기재부의 포식자, 박성준 국장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는 더 이상 내 제안을 무시할 수 없었다. 감성적인 이야기로 여론을 선동하여, 예산의 원칙을 흔들려는 위험한 시도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며칠 뒤, '범부처 부동산 태스크포스(TF)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명분은 심도 있는 검토였지만, 실상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내 보고서를 조목조목 반박하여 재기 불능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뻔했다.


회의 전날, 국장님이 다시 나를 불렀다. 그는 결심이 선 듯한 얼굴이었다. "김 주무관, 그들이 숫자로 공격해올 때, 우리는 사람으로 맞서야 하네. 자네의 보고서가 그 자체로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야. 내일 회의에서 자네에게 발언 시간을 최대한 주겠네. 주눅 들지 말고, 자네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게." 그는 더 이상 방관자가 아니었다. 나의 싸움을 자신의 싸움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회의장은 이전보다 훨씬 크고 무거웠다. 국토부는 물론, 보건복지부, 행정안전부 등 각 부처의 실무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박성준 국장은 회의 시작과 동시에 거대한 스크린에 복잡한 그래프와 숫자로 가득 찬 PPT를 띄웠다.


"김현우 주무관의 제안, 감성적으로는 훌륭합니다. 보고서에 담긴 사연들,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국정 운영은 감성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레이저 포인터로 스크린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붉고 거대한 숫자가 모두의 시선을 압도했다.


"시뮬레이션 결과, '도심 상생주택' 프로젝트를 10년간 추진할 경우, 토지보상비 120조, 건축비 80조, 기반시설 조성 50조. 총 250조 원의 추가 재정이 필요합니다. 이는 국가 부채 비율을 10% 이상 급등시켜 재정 건전성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수치입니다. 미래 세대에게 빚더미를 안겨주자는 말씀입니까?"


그의 공격은 날카롭고 집요했다. 그는 내 보고서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오직 '비용'과 '부채'라는 숫자의 창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 버렸다. 회의장의 공기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아무도 감히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내 옆에 앉아 계시던 우리 부처 국장님이 조용히 마이크를 켰다.


"박 국장님, 그 250조라는 숫자에는 주거 불안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치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비용은 계산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우리 국장님께 쏠렸다.


"매년 급감하는 혼인율과 출산율, 청년들의 정신 건강 문제, 이로 인한 사회적 활력 저하. 이런 것들을 비용으로 환산하면 과연 얼마가 될까요? 김 주무관의 제안은 돈을 쓰자는 게 아니라, 미래에 더 큰 비용을 막기 위해 지금 투자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국장님의 지원 사격에도 불구하고, 회의의 분위기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박 국장은 승리를 예감한 듯,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좋습니다. 국토부의 의지를 존중해서, 딱 1,000억 원 규모로 '시범 사업'을 해보시죠. 서울 외곽의 작은 부지에 100세대 정도 지어보고, 5년 뒤에 성과를 평가해서 다시 논의합시다."


그것은 교묘한 함정이었다. 시범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프로젝트의 규모와 의미를 축소시켜, 결국에는 흐지부지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내가 절망감에 입술을 깨물던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회의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보건복지부의 백발이 성성한 노년정책과장, 최민식 과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노트북을 스크린에 연결했다. 화면에는 두 개의 그래프가 나타났다. 하나는 지난 30년간 청년층의 주거비 부담 추이였고, 다른 하나는 노년층의 빈곤율 및 고독사 발생률 추이였다. 두 그래프는 무서울 정도로 똑같은 모양으로 치솟고 있었다.


"저희 부처에서 매년 독거노인 고독사 문제로 쓰는 예산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그분들이 젊었을 때 안정된 주거 환경만 있었더라도,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박 국장님께서는 10년 뒤의 재정 건전성을 말씀하시지만, 이 데이터는 지난 30년간의 방치가 만들어낸 청구서입니다. 사회적 비용의 청구서는 반드시 다음 세대에게 날아옵니다. 박 국장님께서는 재정 건전성을 말씀하시지만, 저는 '사회적 건전성'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제안, 비용 문제로 폐기하기에는 그 안에 담긴 사회적 가치가 너무나 큽니다. 전면적인 재검토를 제안합니다."


'사회적 건전성'. 그 한마디가 회의장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기재부의 논리에 눌려 있던 다른 부처의 실무자들 사이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결국 회의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끝났다. 나의 제안은 통과되지도, 폐기되지도 않았다. 대신 '관계 부처 합동 TF를 구성하여 추가 검토'라는 애매한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회의실을 나오며 박 국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는 분노와 함께, '네가 감히'라는 듯한 차가운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는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감성팔이... 오래 못 갈 겁니다."


나는 '예산'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성벽에 온몸으로 부딪혔다.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아주 작은 균열 하나는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싸움이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더 단단하고 정교한 무기를 만들어야 했다. 나의 작은 균열을, 성벽 전체를 무너뜨릴 거대한 폭풍으로 키워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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