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 5천만원의 무게
박성준 국장의 반격은 예상보다 훨씬 집요하고 교활했다. ‘관계 부처 합동 TF’는 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는 언론에 익명의 정부 관계자를 인용하여 교묘하게 정보를 흘렸다. 보수 성향의 한 유력 일간지는 1면에 대문짝만하게 헤드라인을 뽑았다. "국토부발(發) 250조 세금폭탄, 미래세대에 빚더미 떠넘기나". 기사에는 내 이름 석 자와 함께, 내가 과거에 작성했던 평범한 정책 보고서들까지 들춰내며 나를 ‘현실 감각 없는 이상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순식간에 나의 '도심 상생주택'은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무책임한 포퓰리즘 정책으로 낙인찍혔다.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나는 부처 내에서 역적으로 몰리는 신세가 되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동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내 시선을 피했고, 점심시간이면 북적이던 구내식당 내 자리는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심지어 감사실에서 "최근 김현우 주무관의 외부 활동 내역에 대한 자료를 요청한다"는 공문이 내려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박 국장이 나를 옭아맬 먼지 한 톨이라도 찾아내려 한다는 뜻이었다.
과장님은 이제 내게 보고서를 올리라고 말하는 대신, 안쓰러운 눈빛으로 내 어깨를 두드리고 지나갈 뿐이었다. 고립감과 패배감이 목까지 차오르던 어느 날 밤, 사무실에서 홀로 야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모니터에는 나를 비난하는 기사들과 그 아래 달린 수백 개의 악성 댓글들이 띄워져 있었다. ‘세금 도둑’, ‘철없는 이상주의자’. 날카로운 활자들이 심장을 후벼 팠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책상 위 사직서를 만지작거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모니터 오른쪽 하단에 작은 메일 도착 알림이 떴다.
발신자는 ‘J’. 제목도, 본문도 없었다. 오직 파일 하나만이 덩그러니 첨부되어 있었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박 국장 측에서 나를 옭아맬 미끼를 던진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망설였다. 하지만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는 자조적인 생각에, 홀린 듯이 파일을 클릭했다.
파일이 열리는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그 안에는 박성준 국장의 재정 건전성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OECD 국가들의 주거 안정 정책 보고서가 들어있었다. 주거 안정성이 출산율과 경제 성장률에 미치는 긍정적 상관관계 분석, 초기 공공주택 투자 비용 대비 장기적인 사회복지 비용 절감 효과 비교.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지만 접근 권한이 없어 볼 수 없었던, 기재부와 보건복지부의 내부 데이터로만 가능한 정교한 분석이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짧은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벽은 부서져야 합니다. 혼자가 아닙니다."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J'는 누구일까? 나는 답신을 보내고 싶었지만, 발신 주소는 추적이 불가능한 가상 IP였다. 나는 이게 또 다른 함정일 가능성을 버리지 않았다. 며칠간, 나는 J가 보내온 OECD 보고서의 데이터를 다른 경로를 통해 검증하며 밤을 새웠다. 데이터는 진짜였다.
그때부터였다. 매일 밤, 약속처럼 익명의 메일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밤에는 ‘K’라는 발신자로부터 행정안전부의 ‘수도권 내 미활용 국유지 현황 데이터’가, 그 다음 날에는 ‘L’로부터 국세청의 ‘다주택자 편법 증여 및 세금 회피 패턴 분석 자료’가 첨부되어 왔다. 이것은 단순한 보고서가 아니었다. 내부 결재가 끝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원본 데이터들이었다. 이걸 외부에 유출하는 것은 공무원으로서 파면까지 각오해야 할 위험한 일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J'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거대한 관료 조직의 곳곳에 숨어있는, 이름 없는 주무관과 사무관들이었다. 박성준 국장의 독단과 경직된 관료주의에 염증을 느낀, 그러나 감히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젊은 공무원들.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돕기 위한 '지하 연대'를 결성한 것이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내가 필요로 할 무기와 방패를 비밀리에 만들어 보내주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들의 보이지 않는 희망이 되어, 가장 앞에서 싸우는 창끝이 된 것이다.
얼마 뒤, 최종 보고를 위한 마지막 TF 회의가 열렸다. 박성준 국장은 승리를 확신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김현우 주무관, 그 비현실적인 꿈은 이제 그만 접으시죠. 최종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부적합' 판정을 내리겠습니다."
나는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노트북을 스크린에 연결했다. 첫 화면에는 ‘J’가 보내준 OECD 보고서의 핵심 그래프가 떠 있었다.
"국장님께서는 이것을 비용이라 말씀하셨지만, 저는 이것을 '가장 수익률 높은 투자'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나는 J, K, L이 보내준 자료들을 바탕으로, 주거 안정이 어떻게 청년들의 가처분 소득을 늘려 내수 시장을 활성화시키는지, 어떻게 출산율을 높여 미래의 생산 가능 인구를 확보하는지를 데이터로 증명해 보였다.
"지금 우리가 짓는 것은 단순히 콘크리트 아파트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미래 세대의 '희망'과 '가능성'을 짓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재정 건전성입니다."
내 마지막 말이 끝나자, 회의장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박성준 국장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가 사라져 있었다. 그는 나의 논리가 아니라, 그 뒤에 숨어있는 정교하고 방대한 데이터의 힘에 압도당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성벽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날 회의에서도 최종 결론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나의 제안은 더 이상 한 주무관의 '치기 어린 꿈'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정부 조직 내부에 살아 숨 쉬는, 변화를 향한 젊은 양심들의 '조용한 혁명'이었다. 나는 회의실을 나오며 굳게 주먹을 쥐었다. 보이지 않는 동지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결코 이 싸움을 포기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