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 움 Part14

나는 유령이었다.

by sarihana

4부. 폭풍 속의 섬

14장. 따뜻한 섬, 차가운 파도


수현이 떠난 후 다섯 번째 겨울이 지날 무렵, 우리 병동은 병원 내에서 '기적'이라 불리고 있었다. 예전의 숨 막히는 긴장감과 차가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점심시간 탕비실에서는 더 이상 침묵과 뒷담화 대신, 따뜻한 대화가 오갔다. 한 선배 간호사가 갓 들어온 신입의 차트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선생님, 어제 그 환자분 차팅, 이 부분은 이렇게 수정하면 더 명확할 것 같아." 신입은 "감사합니다, 선배님!"하며 진심으로 웃었다. 과거의 폭언이 사라진 자리를 건설적인 대화가 채우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환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얼마 전에는 한 보호자가 퇴원 수속을 밟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간호사님, 사실 저희 아버지 다른 병동에 계시다가 여기로 오셨어요. 예전 병동에서는 간호사님들 얼굴 보기도 힘들었는데, 여기서는 저희를 정말 가족처럼 대해주시네요. 덕분에 아버지가 마지막 가시는 길, 외롭지 않으셨어요." 그녀의 진심 어린 감사에, 나는 우리가 가는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 소문은 병원 전체로 퍼져나갔다. 다른 병동 간호사들은 우리를 ‘폭풍 속의 따뜻한 섬’이라 불렀다. 최근 우리 병동으로 전입 온 한 간호사는 탕비실에서 내게 말했다. "예전 병동에서는 신입이 실수하면 일주일 내내 인격 모독을 당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다들 감싸주고 다시 가르쳐주네요. 아직도 꿈꾸는 것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는 수현이 그토록 바랐을 풍경이 조금씩 현실이 되어가는 것을 보며, 묵묵히 버텨온 지난 시간들을 위로받았다.


하지만 그 섬을 향해, 차가운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시작된 변화의 조짐은,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냈다. 어느 날부터인가, 말끔한 정장을 입은 경영기획실 직원들이 우리 병동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마치 공장의 생산 라인을 점검하듯 우리를 지켜보았다. 한 간호사가 울고 있는 환자를 위로하자, 한 직원이 다가와 "환자와의 라포 형성 시간이 규정된 업무 시간을 5분 초과하고 있습니다"라며 대화를 중단시켰다. 또 다른 직원은 버려진 의료 폐기물 봉투를 열어 규정보다 많은 소모품이 쓰였는지를 체크하기도 했다. 그들의 시선 아래에서 우리는 마치 실험실의 쥐가 된 듯한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경영 구조 개선을 위한 현장 실사"라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았다.


그들이 다녀간 뒤, 나는 잠시 숨을 돌리며 평화로운 병동을 둘러보았다. 동료들은 서로 웃으며 인계를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이 풍경을 지켜내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나를 덮쳤다. '우리가 만든 이 작은 평화가, 저들의 스프레드시트 위에서는 어떻게 보일까. '비용', '비효율', '개선 대상'. 나는 우리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얼마나 연약한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며칠 뒤, 병원 전체 메일로 ‘경영 효율성 증대를 위한 성과 평가 시스템 도입’이라는 공지가 내려왔다. ‘환자 중심 경영’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모든 의료 행위를 숫자로 환산해 평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병상 회전율, 간호사 1인당 담당 환자 수, 처치 소요 시간, 약품 및 소모품 사용량 등... '시너지 창출', '자원 최적화' 같은 낯선 단어들이 공지문을 가득 채웠다. 나는 깨달았다. 과거의 괴물은 우리 면전에서 소리를 지르고 폭력을 휘둘렀지만, 새로운 괴물은 점잖은 얼굴로 웃으며 이메일로 우리를 평가하고 통제하려 한다는 것을.


삭막한 단어들 속에서 나는 불길한 징조를 읽었다. 우리가 지켜온 인간적인 가치들은 숫자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환자에게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 불안에 떠는 보호자의 손을 잡아준 시간, 동료의 힘든 마음을 알아봐 준 순간들. 이 모든 것들은 결코 계량화될 수 없었다. 이 새로운 시스템은 우리가 쌓아 올린 따뜻한 공동체를 다시 해체하고, 모두를 다시 경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었다. 차가운 파도는 이미 섬의 턱밑까지 차올라 있었다. 섬이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14-2장. 숫자의 속삭임


내 이름은 최민준, 이 대학병원의 경영기획실 과장이다. 나는 의사가 아니다. 나는 이 거대한 유기체를 살리기 위해 투입된 외과 의사다. 나의 수술대는 스프레드시트이고, 나의 메스는 데이터다. 나는 감상이나 관습이 아닌, 오직 숫자가 속삭이는 진실만을 믿는다.


내 사무실은 병원 본관 최고층에 있다. 창밖으로는 부산항 대교의 웅장한 곡선이 펼쳐지지만, 나는 그 풍경을 보는 법이 없다. 내 시선은 언제나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데이터 대시보드에 고정되어 있다. 병상 회전율, 재고 자산, 인력 운용 효율, 시간당 수익률. 수십 개의 그래프와 숫자들이 실시간으로 깜빡이며 이 병원의 혈압과 맥박, 호흡을 내게 보고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병원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붉은색으로 점멸하는 적자 그래프를 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파산하던 공장을 떠올린다. 직원들을 가족처럼 아꼈지만, 비효율적인 운영과 감성적인 경영으로 결국 모든 것을 잃었던 아버지. 빚쟁이들 앞에서 눈물 흘리던 아버지의 무력한 모습을 본 그날 이후, 나는 맹세했다. 나는 다시는 아버지처럼 실패하지 않겠다고. 감상은 죽어가는 자들이 부리는 사치일 뿐이다.


오전 10시, 본사와의 화상 회의 시간. 화면 속의 더 높은 상사는 냉혹한 목소리로 나를 압박했다. "최 과장, 다음 분기까지 인건비 15% 감축 목표 달성 못 하면, 자네 자리도 장담 못 해. 7B 병동이 문제라면, 해결해. 못하겠으면 자네를 해결할 다른 사람을 찾을 테니." 압박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나는 그 압박을 병동으로 전달해야 할 책무가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나는 다시 7B 병동의 데이터를 분석했다. 간호사 이희진. 그녀의 파일을 검토했다. '감성적 연대를 통해 비효율적인 로열티를 구축한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조직 안정에 기여하는 듯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합리적 의사결정을 방해하는 가장 큰 암초다.' 그녀는 강력하지만, 잘못된 목적에 사용되고 있는 도구였다. 제거해야 할 변수임에는 틀림없었다.


며칠 뒤, 나는 그녀를 내 사무실로 호출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의 낮은 재입원율이 장기적으로 병원에 이익이라고 항변했다. 순진하고 낡은 생각이었다. 나는 내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희진 간호사님, 재입원율 같은 건 ‘소프트 데이터’입니다. 해석의 여지가 많죠. 하지만 병상 회전율, 초과 근무 수당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하드 데이터'입니다. 이사회는 오직 하드 데이터로만 보고받습니다.”


그녀의 눈이 절망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마지막 기회를 주기로 했다. 동정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를 해고하고 병동을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소음과 비용을 계산했기 때문이다.


“다음 달까지 유의미한 개선이 없을 시, 병동 운영에 대한 특단의 조치가 있을 겁니다. 이희진 간호사님의 개인적인 신념이, 다른 동료들의 생존을 위협해서는 안 되겠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사무실을 나갔다. 나는 그녀가 나를 피도 눈물도 없는 구조조정 전문가라고 생각하리라는 것을 안다. 틀렸다. 나는 누구보다 뜨거운 피를 가졌다. 다만 그 피를, 죽어가는 환자가 아닌 죽어가는 병원 전체를 살리는 데 쓸 뿐이다. 감성에 휘둘려 모두가 함께 침몰하는 것보다, 냉철한 판단으로 다수를 살리는 것. 그것이 진짜 리더십이다.


퇴근 시간, 나는 완벽하게 정돈된 사무실을 나섰다. 자율주행차가 안내하는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따라, 가구 하나 없이 미니멀한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는 영양성분이 완벽하게 계산된 단백질 셰이크 한 잔. 내 공간에는 가족사진도, 취미 용품도, 그 어떤 인간적인 '비효율성'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숫자들이 다시 내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감정도, 편견도 없이 오직 진실만을 말했다.


'숲을 살리기 위해서는, 때로 감상에 젖은 가지 몇 개쯤은 쳐내야 하는 법이다.'


나는 내일 이사회에 제출할 '7B 병동 구조조정 계획안' 파일의 최종 검토를 시작했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당연한 임무였다.





이전 14화태  움 Part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