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령이었다.
새롭게 도입된 성과 평가 시스템은 보이지 않는 감시탑이었다. 간호사들의 모든 움직임은 숫자로 환산되어 전산 시스템에 낱낱이 기록되었고, 매주 금요일이면 엘리베이터 옆 게시판에 병동별 ‘성취도’가 그래프로 공개되었다. 우리 병동의 그래프는 언제나 벽에 난 핏자국처럼 붉은색이었다. '개선 필요'를 의미하는 낙인이었다. 동료들은 게시판 앞을 지날 때마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따뜻했던 섬은 내부에서부터 침식되고 있었다. 어느 날, 신입인 하나 씨가 첫 수술을 앞두고 불안에 떠는 노인 환자의 손을 잡고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칭찬받았을 그 모습에, 이제는 민지 선배가 다가와 자기혐오가 섞인 불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나 씨, 미안한데… 우리 병동 '환자당 평균 처치 시간'이 너무 길게 나오고 있어. 이러다 다 같이 페널티 받게 돼. 다음 환자분 먼저 봐줘." 선의를 가진 동료가, 시스템의 압박 때문에 다른 동료의 선한 행동을 제지해야 하는 비극이었다. 숫자는 그렇게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에게도 그 화살이 돌아왔다. 어느 날 오후, 나는 경영기획실로 호출되었다. 내가 일하는 병동의 어수선하지만 사람 사는 온기가 있던 풍경과 달리, 그곳은 먼지 하나 없는 미니멀한 인테리어, 개인적인 물건은 찾아볼 수 없는 책상, 그리고 벽 한쪽을 가득 채운 거대한 스크린에 병원 전체의 실시간 수익률 그래프가 번쩍이는, 차갑고 비인간적인 공간이었다. 마치 인간의 감정이란 변수가 제거된 진공상태 같았다.
차가운 푸른빛을 내는 모니터 앞에 앉은 젊은 과장은, 완벽하게 다려진 와이셔츠처럼 빈틈없어 보였다. 그는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기계가 결과를 출력하듯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희진 간호사님, 환자 만족도 점수는 칭찬할 만합니다. 병원 홍보에도 도움이 되고요. 하지만 이희진 간호사님 병동의 초과 근무 수당은 병원 평균 대비 30%가 높고, 병상 회전율은 최하위 수준입니다. 이건 지속 가능한 수치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업이고, 이윤을 창출해야 합니다. 감성에 호소하는 간호는 비즈니스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숫자’라는 단어는 폭력과 다르지 않았다. 과거의 수간호사와 민지 선배의 고함이 내 감정을 할퀴는 뜨거운 폭력이었다면, 그의 숫자는 내 모든 노력과 신념의 가치를 소리 없이 질식시키는 차가운 폭력이었다.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 초과 근무 수당은 저희가 환자 곁을 한 번이라도 더 지키려 했던 시간의 대가입니다. 그 낮은 병상 회전율은, 환자가 온전히 회복해서 다시는 병원으로 돌아오지 않도록 살폈다는 증거입니다. 저희 병동의 재입원율이 병원 평균보다 20% 낮다는 데이터는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장기적으로 병원의 비용을 얼마나 절감하는지는 계산해보셨는지요.”
그는 처음으로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내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나의 신념이 얼마나 순진하고 시대착오적인지를 비웃는 듯했다. “이희진 간호사님, 재입원율 같은 건 '소프트 데이터'입니다. 해석의 여지가 많죠. 하지만 병상 회전율, 초과 근무 수당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하드 데이터'입니다. 이사회는 오직 하드 데이터로만 보고받습니다.”
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사람은 악인이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이것이 병원을 위한 최선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숫자라는 종교의 광신도이며, 인간의 마음을 비과학적이고 불합리한 변수로 취급하고 있었다. 수간호사님의 폭력은 차라리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선의로 포장된, 인간에 대한 완벽한 몰이해가 더 무섭다.
그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최종 통보를 내렸다.
“다음 달까지 유의미한 개선이 없을 시, 병동 운영에 대한 특단의 조치가 있을 겁니다. 인력 감축이든, 병동 통폐합이든,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있을 거라는 뜻입니다. 이희진 간호사님의 개인적인 신념이, 다른 동료들의 생존을 위협해서는 안 되겠죠.”
간호사실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깊은 무력감에 휩싸였다. 공감과 위로, 내가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믿었던 것들이 저 차가운 숫자의 벽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내가 수현의 죽음 이후, 그리고 수간호사와 민지 선배와의 화해를 통해 깨달았던 모든 가치들이, 이제는 그저 ‘비용’으로 계산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적과 싸우는 것보다, 악의조차 없는 거대한 시스템과 싸우는 것이 몇 배는 더 힘들었다. 숫자의 차가운 파도가, 우리가 쌓아 올린 따뜻한 섬의 모래를 한 줌씩 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