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 움 Part16

by sarihana

16장. 뜻밖의 동맹


그날 밤, 나는 홀로 스테이션에 남아 경영진에게 제출할 ‘우리 병동의 비효율성에 대한 변론서’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하얀 워드 창 위에서 커서만 깜빡일 뿐, 단 한 문장도 쓸 수 없었다. '환자 한 명에게 쏟는 위로의 시간 = 측정 불가', '동료를 격려하는 마음 = 수치화 불가능'. 그들의 언어는 냉혹한 숫자였고, 나의 언어는 눈물과 한숨, 그리고 환자와 동료의 온기 같은 것들이었다. 나의 헌신을 숫자로 번역하려 할수록, 그 모든 가치가 사라지는 것 같아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결국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수현아… 미안해. 난 여기까지인가 봐." 나지막한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벌써 포기하는 거요? 난 당신이 이것보단 더 독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외과 전문의 박진우 선생이었다. 그는 복도 저편에서 잠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수현의 죽음 이후 병원 로비에서 절규하던 나의 모습, 그리고 응급 상황에서 침착하게 동료들을 이끌던 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저 여자는… 나처럼 포기하지 않았군.' 그는 자신이 잃어버렸던 과거의 투지를 나에게서 발견하고, 마침내 자신이 오랫동안 갈아온 칼을 건네기로 결심했다.


그는 여전히 무뚝뚝하고 시니컬한 표정으로 내 책상 앞에 섰다. 내가 보고 있던 붉은색 가득한 성과표를 힐끗 보더니, 혀를 찼다. “결국 스프레드시트로 사람을 잡겠다는 거군. 저들이 가장 좋아하는 무기지.”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경멸이 담겨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USB 하나를 꺼내 내 책상 위에 툭 던졌다.


“그렇게 감성적으로 호소해봤자, 저들은 눈 하나 깜짝 안 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눈물이 아니라 숫자의 언어로만 소통하니까. 싸우려면, 저들이 쓰는 언어로 싸워야죠. 숫자로.”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5년 전, 내가 레지던트일 때…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가 있었소. 소윤이라고. 웃는 게 참 예쁜 아이였지. 단순 맹장염인 줄 알았지. 그런데 수술 중에 복막염으로 번졌어. 응급 상황이었는데, 그날따라 마취과 의사는 비용 절감이라는 명분 아래 두 개의 수술실을 동시에 커버하고 있었고, 베테랑 간호사는 막 들어온 신입으로 교체된 뒤였소. 단 5분의 지연이, 그 아이의 평생을 앗아갔지.”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희미하게 떨렸다. “수술실 밖에서 아이를 기다리던 어머니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오. 내가 차마 아이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을 때, 그분이 내 손을 보더군. 딸을 살리지 못한 이 손을… 그날 이후로 내 손은 늘 차갑게 느껴졌소.” 그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가 있었던 것이다.


“병원은 모든 책임을 내 판단 착오로 돌렸소. 조직의 시스템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실수로. 나만 미친놈이 됐지. 그때부터 모은 겁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고.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USB를 노트북에 꽂았다. 화면에는 지난 5년간 병원의 비효율적인 인력 구조 문제로 발생한 의료 사고들과 그로 인한 사망률, 재입원율 같은 데이터들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수현’들과 ‘소윤’이들의 이름 없는 비명이자, 시스템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살인의 기록이었다. 내 싸움이 단지 우리 병동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데이터에서 눈을 떼자, 더 이상 절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차갑고 날카로운 분노가 들어차 있었다. 나는 박진우 선생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선생님… 저와 함께 싸워주시겠습니까?"


그는 그런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5년 전에 이미 이 싸움을 시작했소. 이제 끝을 볼 때가 된 것뿐이오."


우리 사이에는 뜨거운 악수나 위로의 말은 없었다. 하지만 같은 상처를 가진 두 사람이 서로의 눈빛을 통해 확인한 침묵의 맹세는, 그 어떤 약속보다도 단단하고 비장했다. 박진우 선생은 돌아서며 마지막 말을 던졌다. "진짜 싸움에 온 걸 환영하오, 이희진 선생.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러울 거요." 그날 밤, 내 손에 들린 것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었다. 이 거대한 하얀 지옥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를, 차갑고 날카로운 칼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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