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 움 Part21

나는 유령이었다.

by sarihana

21장. 끝나지 않은 싸움


청문회 이후 세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사회적 여론에 힘입어 간호 인력 충원에 대한 법률이 개정되었고, 모든 병원 내에 인권위원회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는 조항이 신설되었다.


우리가 그 소식을 들은 것은, 보증금도 없어 문 닫은 식당 한 켠을 빌려 쓰고 있던 '수현 연대'의 초라한 사무실에서였다. 낡은 텔레비전 화면으로 병원장의 사퇴와 우리의 징계가 철회되었다는 속보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사무실에는 환호성 대신 길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누구는 말없이 눈물을 훔쳤고, 또 누구는 지친 얼굴로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축제는 없었다. 그저 끔찍한 전쟁이 끝난 뒤 폐허에 남겨진 생존자들의, 납처럼 무거운 안도감만이 감돌았다. 침묵을 깬 것은 박진우 선생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툭 던졌다. "축하할 일인지는 모르겠군.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일 텐데."


그의 말은 예언이 되었다. 승리의 대가는 달콤하지 않았다. 언론의 관심이 차츰 식어가자, 냉혹한 현실적인 문제들이 우리를 덮치기 시작했다. 거대 로펌을 앞세운 병원과의 지리한 법적 다툼이 계속되었고, 우리의 활동 자금은 바닥을 드러냈다.


어느 날, 우리를 돕던 변호사가 찾아와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들의 전략은 승소가 아닙니다. 소송을 최대한 길게 끌어서 여러분을 재정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 쓰러지게 만드는 겁니다. 이건 자원과 시간의 싸움입니다." 그의 말처럼, 사무실 임대료는 석 달 치가 밀렸고, 후원금 계좌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싸워온 동료들도 지쳐가고 있었다. 며칠 뒤, 가장 헌신적이었던 동기 지나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의 눈 밑은 검게 그늘져 있었다. "희진아… 나 이제 너무 지쳤어. 부모님은 매일 전화해서 우셔. 평범한 간호사로 돌아가면 안 되겠냐고… 내가 뭘 위해 싸우고 있는지, 이젠 나도 잘 모르겠어. 미안해." 그녀의 눈물은 내게 비수처럼 박혔다. 나는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소중한 동료들의 무너지는 마음까지 지켜야 하는 리더의 무거운 짐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나는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흩어지려는 동료들을 붙잡고 '수현 연대'의 기틀을 다졌다. 빛나는 영광 대신, 땀과 눈물로 얼룩진 투쟁의 시간이 주어졌다. 우리는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다른 이들의 고통을 기록하며,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밀린 임대료 고지서를 보며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우리가 지켜온 이 작은 사무실마저 곧 사라질지 모른다는 공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목까지 차오를 때였다. 정적이 흐르던 공간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제주도의 한 병원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어린 간호사의 절박한 제보 전화였다. 그녀는 수현과 너무나도 닮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두려움과 고통을 털어놓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었다. 그녀의 절규를 들으며, 지쳐있던 내 마음속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왜 이 싸움을 멈출 수 없는지,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흔들림 없이 말했다.


"선생님, 혼자가 아니에요. 저희가 함께 하겠습니다."


그 약속은 그녀뿐만이 아닌, 흔들리는 나 자신과 지쳐가는 동료들, 그리고 하늘의 수현을 향한 나의 재다짐이었다. 그녀에게 방패가 되어주겠다고 약속하는 순간, 나는 역설적으로 내 자신의 부서진 갑옷을 다시 벼리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도시를 적시고 있었다. 우리가 얻어낸 작은 승리는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막 시작된, 더 길고, 더 힘겨운 싸움의 서막일 뿐이었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수현의 사진을 보며 조용히 맹세했다.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결코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쏟아지는 비처럼 힘든 현실은 계속되었지만, 이제 내 곁에는 수많은 동료들이 함께 우산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들의 연대가 있었기에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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