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 움 Part22

나는 유령이었다.

by sarihana

6부. 우산의 무게

22장. 메아리치는 복도


법 개정이라는 사회적 승리 이후, 또 몇 번의 계절이 흘렀다. 내가 동료들과 함께 세운 '수현 연대'는 이제 대한민국에서 간호사들의 인권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목소리가 되어 있었다. 언론은 나를 '세상을 바꾼 간호사'라고 불렀고, 내 이름 앞에는 늘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어느 날 오후, 나는 한 대학의 강연회에 서 있었다. 수백 명의 예비 간호사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연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학생들은 구름처럼 몰려와 사인을 요청하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나를 살아있는 전설이자,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밝혀준 등대처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선망 어린 눈빛 속에서, 과거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시절 수현과 함께 울었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미묘한 거리감과 슬픔을 느꼈다. 그들은 나의 승리를 보았지만, 그 승리가 내 친구의 재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여러분은 저처럼 되지 마세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내뱉지 못했다. 영웅이라는 이름은 때로 가장 무거운 족쇄였다.


강연회가 끝나고 인파 속에서 빠져나올 때였다. 한 앳된 간호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붙잡았다. "대표님, 정말 존경합니다! 그런데… 저희 병원은 개정된 법의 허점을 이용해 여전히 인력을 충원하지 않고 있어요. 어제도 16시간 연속 근무를 했습니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막막합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수현 연대'의 연락처를 알려주며 절차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예전의 나라면 당장 그 병원으로 달려가 함께 피켓을 들었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그저 '절차를 안내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눈에 스친 아주 희미한 실망감을, 나는 보았다. 그녀는 투사를 찾아왔지만, 결국 정책 전문가를 만났을 뿐이었다. 나는 현장과 멀어지고 있었다.


며칠 뒤, 나는 익숙하지 않은 국회 복도를 걷고 있었다. 또 다른 법안 개정을 위해 국회의원들을 만나고 설득하는 것이 나의 새로운 일상이 되어 있었다. 피와 눈물의 냄새 대신 값비싼 향수와 묵은 종이 냄새가 뒤섞인 복도. 환자의 절박한 신음 대신, 정치인들의 계산된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는 이 공간에서 나는 점점 이질감과 고독을 느끼고 있었다.


한 중진 의원이 복도에서 나를 발견하고는 과장된 환대와 함께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아이고, 우리 이희진 대표님! 우리 사회의 영웅이시죠! 제가 얼마나 응원하는지 아십니까?" 나는 준비해 간 자료를 내밀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금세 표정을 바꾸며 말을 잘랐다. "물론 좋은 말씀이지만, 현실 정치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예산 문제도 있고, 다른 이익 단체와의 형평성도 고려해야 하고… 차차 논의해봅시다." 진심이 아닌, 계산과 명분만이 존재하는 세계. 잠시 눈을 감자, 마치 환청처럼 심박 측정기의 단조로운 기계음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현장의 간호사들은 여전히 힘들다고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손을 잡고 함께 투쟁하는 대신, 회의실과 카메라 앞에서 그들의 고통을 '대변'할 뿐이었다. 나는 길을 잃고 있었다.


그때, 정부 고위 관계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정부 주도로 각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간호환경 선진화 위원회'가 곧 출범하는데, 그 상징적인 인물로 나를 위원회에 초빙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동료들은 모두 환호했다. 마침내 우리의 목소리가 제도의 중심부로 들어가 직접 정책을 바꾸게 되는 것이라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의 증거라고 기뻐했다.


하지만 나는 불안하고 두려웠다. 강당에서 만난 어린 간호사의 절박한 눈빛과 국회 복도에서 마주친 정치인의 위선적인 얼굴이 떠올랐다. 밖에서 소리치는 것만으로는 저 단단한 벽을 넘을 수 없다. 함정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벽을 넘지 못하면, 현장의 절규는 영원히 메아리로만 남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밖에서 외치다 무력해질 것인가', 아니면 '안으로 들어가 침묵당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잔인한 도박처럼 느껴졌다. 내 투쟁은 또 다른 시험대 위에 올라서 있었다.


22-2장. 숲을 위한 가지치기


내 이름은 이강윤, 이 대학병원의 이사장이다. 사람들은 나를 성공한 경영자라 부르지만, 나는 나 자신을 정원사라 생각한다. 나의 정원은 이 병원, 그리고 이 도시 그 자체다. 정원사는 때로 나무 전체를 위해 병든 가지를 쳐내야만 한다. 나는 그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그것이 숲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최민준 과장에게서 보고를 받았다. 간호사 하나가 시작한 작은 불씨가, 이제는 병원 전체를 태울 기세라는 것이었다. 국회 청문회, 법 개정, 여론의 압박. 최 과장은 상황이 심각하다고 했지만, 내 눈에는 그저 성가신 잡초가 무성해진 것일 뿐이었다.


나는 최 과장에게 지시했다. "새로운 위원회를 만드시오. 그 간호사, 이희진을 위원장으로 앉히고. 최대한 예우하고, 그녀의 의견을 듣는 척 하시오. 시간은 우리의 편이오. 인간의 분노는 시간이 지나면 식게 마련이고, 대중의 관심은 더 자극적인 뉴스로 옮겨가게 되어있지. 우리는 그 시간을 벌면 되는 거요."


최 과장은 내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는 숫자와 효율성을 믿지만, 아직 사람과 권력의 속성은 모른다. 가장 강력한 적을 무너뜨리는 방법은, 적을 내 편으로 만들어 서서히 질식시키는 것이다. 나는 이희진이라는 잡초를, 내 정원 안의 가장 화려한 온실 속으로 옮겨 심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싸움을 원하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회의와 보고서, 그리고 끝없는 논의를 던져줄 것이다. 그녀의 날카로운 칼날은 무뎌질 것이고, 그녀의 뜨거운 분노는 식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자신이 온실 속의 장식품이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세상은 이미 그녀를 잊은 뒤일 것이다.


나는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저 수많은 불빛들, 저 거대한 숲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지 몇 개쯤 쳐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수현이라는 간호사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그것은 숲 전체를 위한 거름이 된 셈이다. 이희진이라는 간호사 역시, 결국은 내 정원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데 쓰일 도구에 불과했다. 나는 와인 잔을 들어, 내 아름다운 정원의 영원함을 위해 조용히 축배를 들었다.





이전 22화태  움 Part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