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 움 Part26

나는 유령이었다.

by sarihana

7부. 빗속의 씨앗

26장. 타협의 진실


마침내 '간호환경 선진화 위원회'의 최종 보고서 초안이 공개되었다.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는 화려한 미사여구와 복잡한 통계로 가득했지만, 그 안에는 아무런 알맹이도 없었다. '인력 충원을 위해 노력할 것을 권고한다', '처우 개선을 위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한다' 등 모든 것이 모호하고, 강제성 없는 권고 사항일 뿐이었다. 내가 그토록 강력하게 요구했던 '간호사 1인당 실제 환자 수 법제화' 조항은 '장기 과제'라는 명분 아래 뒤로 밀려나 있었다.


더욱 잔인한 것은 보고서의 마지막에 교묘하게 삽입된 문장이었다. '간호 인력의 근무 환경 개선을 위한 시스템적 노력과 더불어, 간호사 개개인의 직업윤리 및 스트레스 관리 능력 함양을 위한 문화 개선 또한 동반되어야 할 것.'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그것은 수현의 죽음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했던 병원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했다. 이 보고서는 우리에게 작은 사탕을 건네는 척하며, 등 뒤에 칼을 꽂고 있었다.


그날 저녁, '수현 연대'의 작은 사무실에서 긴급 회의가 열렸다. 보고서 복사본을 앞에 둔 채, 동료들의 얼굴에는 분노와 좌절, 그리고 깊은 피로감이 뒤섞여 있었다. 수간호사가 된 지은 선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수많은 패배를 경험한 자의 지친 현실주의로 가득했다.


"희진아, 나도 이 보고서,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하지만 이게 현실이야. 여기서 우리가 판을 엎으면, 저들은 '대화를 거부하는 강성 단체'라는 프레임을 씌울 거고, 우리는 모든 걸 잃게 돼. 일단 이 서류라도 받아들고, 이걸 발판 삼아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 해. 우리가 거리에서 싸울 때, 누가 우리 말을 들어줬었어?"


그때, 강경파를 이끌던 강유미가 탁자 위에 신문 기사 하나를 내던졌다. 지방 병원에서 또 한 명의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작은 단신 기사였다.


"다음 싸움이요, 선배님?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어요! 이 종이 쪼가리는 현장의 그 누구도 지켜주지 못해요! 여기에 서명하는 건, 그냥 우리가 졌다고, 수현 언니의 죽음은 이 정도 가치밖에 없었다고 온 세상에 인정하는 꼴입니다!"


사무실의 공기는 둘로 쪼개졌다. 동지들의 서로 다른 목소리 속에서, 나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다음 날, 위원장이 나를 따로 불렀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내게 달콤한 유혹을 건넸다. "이희진 대표는 현장뿐 아니라 정책 분야에서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하면, 다음 위원회에서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될 걸세. 더 큰 그림을 보게." 내가 망설이자,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만약 여기서 독단적으로 행동하면, 여론은 이희진 대표를 '대화를 거부하는 독선적인 운동가'로 규정할 걸세. 어렵게 쌓아 올린 모든 명분과 동력을 잃게 될 거야. 다시 거리로 돌아가고 싶나?"


회유와 협박이 뒤섞인 그의 말은 독처럼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날 밤, 나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텅 빈 서명란을 내려다보았다. 한쪽에는 '현실적인 성과'와 '조직의 안정'이라는 논리가 놓여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친구 수현과의 맹세'와 '나 자신의 진정성'이라는 가치가 있었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수현의 사진을 들어 올렸다. 환하게 웃고 있는 친구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수현아, 나 어떻게 해야 할까. 네 이름을 지키는 게 대체 뭘까. 이 종이에 서명하고 더러운 현실과 타협하는 거야? 아니면 이 모든 걸 불태우고 다시 혼자가 되는 거야…? 내가 영웅이 되길 바라는 사람도, 내가 엄마이길 바라는 사람도 있어. 그런데 정작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나는 펜을 들었다 놓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정답일 수는 없었다. 어느 길을 택하든, 나는 무언가를 배신해야만 했다. 이 보고서에 서명하면 나의 신념과 수현의 죽음을 배신하는 것이고, 서명하지 않으면 나와 함께 싸워온 동료들의 기대를 배신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딜레마의 한가운데서 숨 막히는 고통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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