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를 하오 Part5

다시 피어나는 장미

by sarihana

제5장. 도망치는 남자와 남겨진 여자


남편 민준의 연락은 점점 뜸해졌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다른 보호자들의 수군거림은 또 다른 종류의 통증이었다.


"저 방 환자는 남편이 잘 안 오나 봐."

"아내가 아프면 남편들이 더 힘들다더라."


그 차가운 말들은 장미를 병마와 싸우는 환자인 동시에,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로 만들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중요한 프로젝트를 이끌며 수십 명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던 그녀였다. 그런 자신이 이제는 동정이나 받는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에, 슬픔보다 먼저 모멸감이 치밀었다.


어느 날 밤, 유독 외로움이 뼛속까지 스며들던 날, 장미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이 망가진 관계라는 '프로젝트'를 어떻게든 다시 정상 궤도에 올려놓고 싶은, 디자이너로서의 마지막 시도였다.


“민준 씨… 언제쯤 올 수 있어? 지혜가 아빠 보고 싶대. …나도, 보고 싶어.”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내 지친 목소리가 답했다.


“미안. 지금 프로젝트가 너무 중요해서… 거의 사무실에서 자고 있어. 주말에는 꼭 갈게.”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피로감이 묻어났지만, 아내를 향한 따뜻함은 없었다. 또다시 반복될, 지켜지지 않을 약속임을 장미는 직감했다. 전화는 싸움도 없이, 공허한 침묵 속에서 끊어졌다. 장미는 검은 화면이 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그에게 먼저 전화하지 않으리라, 그녀는 조용히 다짐했다. 희망의 마지막 끈이 그렇게 툭, 하고 놓아졌다.


그 시각, 민준은 집으로 향하지 못했다. 아파트 주차장 입구에서 차를 돌려 강변으로 향했다. 그는 차가운 캔맥주를 땄다. ‘치익-’ 하는 소리가, 과거 병원에서 들었던 산소호흡기 소리와 겹쳐 들리는 듯했다. 그는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방금 전 장미와의 통화에서 느꼈던 그녀의 외로움이 죄책감이 되어 그의 목을 졸랐다. 운전대에 머리를 박자, 문득 장미와 연애하던 시절, 이 강변에서 함께 웃던 기억이 스쳤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지금의 자신은 그녀의 고통이 무서워 도망치고 있었다. 그는 끔찍한 자기혐오와 함께, 더 깊은 과거의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기억은 완전한 서사가 아닌, 고통스러운 파편들의 연속이었다. 시야를 가득 채우던 차가운 백색의 천장. 코를 찌르던 알코올 솜 냄새. 엄마의 앙상한 손목 위로 흐르던 투명한 수액 방울. 규칙적으로 울리던 심박 측정기의 단조롭고 섬뜩한 기계음. 그리고 마침내,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며 길게 울리던 직선의 경고음.


열다섯,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스러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지 뼛속 깊이 새겼다. 그리고 지금, 장미에게서 그날의 엄마가 보인다. 나는… 나는 또다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지옥을 견딜 자신이 없다. 그는 공포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장미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무력했던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어둠과 정적이 그를 맞았다. 현관에는 장미가 마지막으로 신었던 구두가 놓여 있었고, 거실에서는 그녀의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거실을 지나 장미의 스튜디오 문 앞에 섰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캔버스 위에는 그리다 만 그림이, 책상 위에는 그녀의 손때가 묻은 도구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그녀의 열정과 재능, 아프지 않았던 시절의 장미가 그 방 안에 있었다. 그는 차마 그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행복했던 과거마저 외면하려는 필사적인 도피였다.


그때, 지혜가 잠에서 깼는지 작은 방에서 나오며 그를 보았다.


"아빠... 엄마는 언제 와?"


아이의 맑은 눈을 마주한 순간,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괜찮은 척 거짓말이라도 해야 했지만, "엄마… 곧 오실 거야" 라고 말하려던 목소리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아내에게 했던 거짓말을 딸에게는 반복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를 품에 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이의 온기를 느끼며, 자신이 지켜야 할 이 아이와 아픈 아내 사이에서 완벽하게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품이 너무나 공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