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어나는 장미
민준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친구 민지였다. 그녀는 늘 완벽한 화장을 한 얼굴로, 장미가 입에 대지도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카페의 화려한 케이크를 사 들고 병실을 찾았다. 그녀의 위로는 언제나처럼 조금 과장되게 다정했고, 미소는 입가에는 머물렀지만 눈에는 닿지 않았다.
“언니, 이거 봐. 언니가 좋아하던 카페 신상이야.”
민지는 장미의 앙상한 손을 잡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장미는 쇠 맛만 느껴지는 입안 때문에 케이크를 먹을 수는 없었지만, 이 삭막한 병실에 찾아와주는 유일한 친구의 마음에 위로를 받았다.
“언니, 프로젝트 걱정 마. 내가 언니 이름에 먹칠 안 되게 잘 지킬게. 언니는 몸만 생각해.”
그 말에 장미는 문득 대학 시절을 떠올렸다. 중요한 과제를 할 때, 민지는 늘 "언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에만 집중해, 지루한 자료 조사는 내가 다 해놓을게"라며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당시에는 그저 든든한 동생의 순수한 응원이라 생각했다. 장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민준 씨는 떠났지만, 내게는 민지가 있어. 내 편이 되어줄 유일한 사람. 이 아이만이 내 재능과 노력을 지켜줄 거야. 그녀는 민지를 단순한 친구가 아닌, 자신의 무너진 삶을 지탱해 줄 구원자로 필사적으로 믿으려 했다.
“…고마워, 민지야. 너밖에 없다.”
장미는 눈물을 글썽이며,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를 낡은 노트에 급하게 스케치해 민지에게 건넸다. 그것은 그녀가 아프기 직전까지 매달렸던, 그녀의 분신과도 같은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민지는 그 노트를 소중하게 받아 가방 깊숙이 넣었다. 노트의 묵직한 무게가 손에 전해지는 순간, 장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과거의 한 장면이 민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대학 졸업반, 중요한 공모전 시상식. 심사위원장은 장미를 향해 ‘타고난 천재성’이라 칭찬했고, 자신에게는 ‘성실한 노력’이라는 위로를 건넸다.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장미를 향해 애써 웃으며 박수를 치면서도, 민지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지 않은 무대 아래의 어둠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언제나 너의 천재성이었지, 장미 언니. 하지만 천재성은 연약한 거야. 이제 그 천재성이 남긴 것을 완성하는 건, 성실한 나의 몫이야.’ 민지는 장미의 노트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그날 저녁, 장미는 멀건 죽을 숟가락으로 깨작이고 있었다. TV에서 익숙한 회사 로고가 나오며, 경제 채널의 특종 뉴스가 시작되었다.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라이징 스타, 민지 팀장님을 모셨습니다.”
앵커의 활기찬 목소리와 함께, 민지가 서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장미의 아이디어로 채워진 기획안을 든 채. 그녀는 "기존의 훌륭하지만 다소 추상적이었던 컨셉을, 제가 현실적인 기술과 접목하여 상용화 단계로 발전시켰습니다"라고 말하며, 장미가 자신에게만 들려주었던 독특한 비유까지 섞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것인 양 유창하게.
숟가락이 손에서 떨어졌다. 쨍그랑. 쇠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화면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민지의 얼굴 위로, 앙상하고 창백한 자신의 얼굴이 유령처럼 겹쳐 보였다. 깨진 화면. 한쪽에는 모든 것을 빼앗은 여자가, 다른 한쪽에는 모든 것을 빼앗긴 여자가 있었다.
내 아이디어. 내 목소리. 내 이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떻게… 네가. 내가 가장 믿었던 네가… 어떻게.
장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민지에게 전화를 걸어 이 악몽이 사실인지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통화 버튼 위에서 멈췄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그녀는 스르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다음 순간, 곁에 있던 물컵을 들어 TV 화면을 향해 던져버렸다.
'와장창!'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TV 화면이 검게 변했다.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 사이로, 모든 것을 집어삼킨 어둠만이 남았다. 사랑의 배신이 남긴 균열 위로, 우정의 배신이 모든 것을 남김없이 무너뜨렸다. 그녀가 딛고 서 있던 땅이 통째로 사라졌다.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