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어나는 장미
TV 화면 속에서 환하게 웃던 민지의 얼굴은 잔상처럼 남아 장미의 뇌리를 태웠다. 그날 이후, 그녀의 시간은 고장 난 시계처럼 무의미하게 흘렀다. 항암치료로 인한 구역질보다 더 지독한 헛구역질이 속에서부터 치밀었다. 그것은 배신감이 만들어낸, 영혼의 구토였다. 마치 영혼의 팔레트가 온통 부패하여 역겨운 잿빛만 남은 기분이었다.
어머니가 애써 끓여 온 묽은 수프에도, 동생 유진이 건네는 약에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몸이 아픈 것이 아니었다. 마음의 모든 기능이 정지해버린 기분이었다. 그녀는 며칠을 살아있는 유령처럼 지냈다. 창밖으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지만, 빛과 어둠의 경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과 그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두꺼운 유리벽이 세워졌고, 가족들의 걱정 어린 목소리는 물속에서처럼 웅웅거리며 멀게만 들렸다. 유진은 언니의 공허한 눈빛을 보며 차라리 화를 내거나 울어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아무런 반응도 없는 그 침묵이, 어떤 절규보다 더 끔찍한 절망의 신호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약 기운에 겨우 얕은 잠에 빠져들었을 때, 새벽 2시, 병원의 인공적인 정적을 칼날처럼 가르는 요란한 경보음이 울렸다.
"코드 블루, 303호! 코드 블루!"
날카로운 기계음과 다급한 외침이 심장을 찔렀다. 장미는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복도 저편에서 간호사들과 의사들의 다급한 발소리, 의료 카트 바퀴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쿵, 하고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도 섞여 들려왔다.
장미는 가슴을 졸이며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복도 끝 303호 병실에서 의료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며칠 전, 앙상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으며 "새댁 눈에 슬픔이 가득하네. 눈물은 비랑 같아서, 실컷 내리고 나면 땅이 더 단단해지는 법이야"라고 따뜻하게 말을 걸어주던 할머니 환자의 병실이었다.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열린 문틈으로 "혈압 계속 떨어집니다!", "에피네프린 준비해!" 하는 절박한 목소리들이 새어 나왔다. 삶과 죽음이 1초를 다투는 치열한 전쟁터였다.
30분 뒤, 모든 소란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요란했던 발소리도, 다급한 외침도 모두 사라진 복도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그 숨 막히는 정적을 가른 것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뿐이었다. 패배를 직감한 정적이었다.
그 시각, 화려한 레스토랑에서는 와인잔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프로젝트 성공을 자축하는 자리의 중심에 민지가 있었다. 상사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민지 팀장 덕분이야. 역시 실무에 강해. 앞으로 우리 회사 미래가 밝아." 민지는 우아하게 웃으며 와인잔을 들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의 야경이 그녀의 성공을 축복하는 듯했다.
다시 병원 복도. 흰 천으로 덮인 한 사람의 형체가 침대 채로 끌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장미는 숨을 죽였다. 곧이어 간호사 두 명이 익숙하고 기계적인 동작으로 303호 병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때 할머니의 삶이 담겨있던 그 공간은 체계적으로 '해체'되고 있었다. 낡은 사진은 공간의 '포인트 컬러'였고, 손때 묻은 찻잔은 공간에 '이야기'를 부여하는 소품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이 차가운 비닐봉지에 담겨 '폐기'되었다. 마지막으로 소독액이 뿌려지자, 할머니의 희미한 체취마저 지워지고 공간은 아무런 개성도 없는 '초기값'으로 돌아갔다. 한 사람의 삶이 그렇게 행정적으로, 소리 없이 '처리'되고 있었다.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유진은 동료들이 사망 시간을 차트에 기록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텅 비어버린 303호와, 바로 그 옆 301호에 있는 언니의 병실 문을 번갈아 보았다. 오늘 죽은 '환자'와 언젠가 죽을지도 모르는 '언니'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공포. 전문가로서 수없이 겪어온 죽음이, 처음으로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며 그녀의 심장을 할퀴었다.
그날 밤, 장미는 잠들지 못했다. 깨진 TV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민지의 웃는 얼굴, 민준의 등, 그리고 소독약 냄새만 남은 텅 빈 병실. 자신의 미래가 저렇게 될까 두려웠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고, 병마에 모든 것을 빼앗긴 채, 결국은 홀로 외롭게,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것. 존재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희미한 얼룩이 되어버리는 것.
그것이 죽음보다 더한 공포가 되어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다. 하지만 그 깊은 공포의 밑바닥에서, 아주 작은 불씨 같은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분노였다.
'이렇게는 아니야. 저렇게 지워지지는 않겠어.'
그녀는 이미 유령처럼 살고 있었다. 배신과 절망에 잠식되어 스스로를 지워가고 있었다. 저 할머니의 마지막과 지금의 내가 무엇이 다른가.
'민준에게 버림받고 암으로 죽는 것은 어쩔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 이름과 내 재능을 훔쳐간 민지에게, 내 존재를 통째로 빼앗기지는 않겠다.'
차가운 이별은, 역설적으로 그녀에게 싸워야 할 가장 뜨거운 이유를 가르쳐주고 있었다.